Fighter 첫 번째 칼은 가슴을 가르고, 두 번째 칼은 심장을 노리며, 세 번째 칼은 혈관과 공명하니…. 누구의 손에 잡히냐에 따라 칼은 예술이 되기도 하고 흉기가 되기도 한다. 그것은 마치 감정처럼,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누군가를 구해내기도 한다. Fighter 0. 처음에는 단순한 변덕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그 무수한 녀석들 사이에서 얻어터지는 그 녀석을 눈여겨 본 것은. “이사님….” 검은 차의 창을 내리고, 거리 밖에 쏟아지는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순간, 앞자리에 탄 비서가 자신을 조용히 불렀다. 서른 넷의 젊은 이사 서인후는 그 음성에 잠깐 고개를 돌린다. 그는 자신을 조심스레 쳐다보는 오랜 비서에게 유유하게 웃어보였다. “저 녀석으로 하지.” 그러자 서른 여덟의 비서는 안색이 벌써 달라진다. 이 젊은 이사가 도대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흡사 노예 시장의 노예를 품평하듯 물건을 보는 눈길이었다. 그러나 인후는 넥타이 매듭을 살짝 풀며 차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저 녀석으로 해.” “하지만…” 비서의 궁금해 하는 낯짝을 보면서도 인후는 요동하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일에 별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그저 심심풀이로 결정 내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사님!!!” “…….” “저 녀석은 어려 보이는데다가, 맥도 못 추고 얻어터지고 있는데…” 그러나 인후는 메마르게 웃었다. 누가 한다 한들 결과는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나 하면 어떤가. 아니, 사실은 가장 가능성 없는 사람을 지목할 수록 이 일은 승산이 있을 것이다. 자신은 그 남자의 기호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 “내가 키우지.” “……!!!” 인후는 느긋하게 담배를 물며 말했다. 달칵, 담배 불을 붙이는 비서의 손등이 살짝 떨린다. 아마도 늙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이 일을 빌미로 또 뭐라고 엄포를 놓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후는 여전히 유유자적했다. 그 호랑이는 진작에 가죽만 있었을 뿐이다. 것도 아니라면, 남의 가죽을 덮어쓴 일개의 토끼이거나. “가서 저 녀석을 사와.” “……!!!” “못 들었나, 선우기영. 가서 얼마를 주든 저 녀석을 내 앞에 데리고 오라고.” 언제나처럼 서늘한 목소리다. 그러나 그 음성에 담긴 엄격한 기운을 눈치 챘는지, 선우기영은 작게 한숨쉬었다. 그는 그대로 다시 고급 승용차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주시했다. 허름한 옷차림에 거의 거지같은 몰골, 게다가 찢겨진 피부위로 듬성 듬성 벌건 자국과 핏자국이 있는 사내.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 만한 녀석이 더러운 바닥에 뒹굴며 발길질을 받고 있었다. 진흙탕 길에 나뒹구는 녀석은 지독히도 평범하고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기영은 자신의 상사가 왜 그를 택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인후는 그 모습을 표정없이 보고 있었다. 무수한 발길질에 나가 떨어진 녀석은 피투성이었다. 생기없는 죽은 눈동자, 거리에 뒹구는 그 눈동자는 아예 얇은 눈꺼풀로 덮인 채 바들거리며 떨린다. 그는 그 진동에 주목했다. 칼자루를 쥐어라, 그러면 진동은 너를 위해 울릴 것이다- 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리고 자신은 가장 비참해 보이는 저 녀석에게 기회를 줄 수 있다. 그가 그것을 받아들이던 아니던,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 “내가 뭘… 한다구요?” 지소는 잠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심한 두통이 이마에서 퍼져나간다. 똑똑똑, 어디선가 낙숫물 소리가 들려왔다. 지소는 눈의 초점을 맞추려 애쓰며 이 사내가 뭐라고 하는 건지 머리 속으로 부지런히 생각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는 건 알겠는데, 문득 눈을 떠 보니 이런 저택이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이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고, 이런 상황도 처음 겪는 일이다. “나이가 몇 살이지?” 허나 남자는 친절하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소는 자신의 주변을 둘러 싼 값비싼 가구 들과 생전 처음 보는 침대보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리고 자신이 눈을 뜨자마자 들을 첫 질문에 무심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열… 여덟요.” 그러자 남자는 마치 언젠가 가게를 습격한 단속 경찰처럼 차갑고 사무적으로 계속 물어댔다. 이름은? 가족은? 그리고 사는 곳은? “이름은, 윤지소…. 가족은 없…고… 사는 곳은… 일정하지 않은…” 이름이나 나이 말고는 딱히 대답해 줄 말이 없다. 지소는 가뜩이나 가게 기도 녀석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은 온 몸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늘 탈출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이 꼴로 흠씬 얻어터졌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처럼 눈을 뜨면 항상 허름하고 남루한 자신의 밀실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오늘 눈을 떴을 때는 늘 보던 그 빗물 얼룩진 천정이 아니었다. 내려앉을 듯 조마 조마 했던 지저분한 지붕 아래가 아니었다. 지소는 가뜩이나 위축된 성격에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히 이 번에도 가게를 탈출하려다가 몸이 아작 나도록 얻어터진 것 같은데… 왜 이런 곳에… “몸을 파는 가게에 있었지?” 그 때 다시 한번 남자가 물었다. 지소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군가 몸을 깨끗이 치료하고, 양 쪽 팔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그 모든 일은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그 때서야 지소는 자신이 결코 평탄치 못한 환경에 와 있음을 자각했다. 이건 뭘까… 도대체 뭐길래… “몇 가지 주의를 주지, 지소군.” “…….” “앞으로 누구를 만나도 나 이외의 사람에게는 네 나이나 직업을 말하지 마라.” 남자는 표정도 없이 안경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 옆에 고급 목재 의자에 앉아서 상당히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꿀꺽, 저절로 마른 침이 넘어간다. 고아원에서 탈출하고, 무리 녀석들과 헤어진 12살 이례로 삶이 평탄하지 못했다. 처음에 는 주유소와 오락실 같은 데서 잔돈을 바꿔주며 동가식서가숙 하던 생활도 결코 오래가지 못했다. 어 쩌다 보니 처음 당한 게 사내놈이고, 그 다음 당한 놈도 사내놈이고… 그런 식으로 해서 몸으로 팔려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내 이름은 선우기영. 네가 앞으로 모실 분의 비서다.” “……!!!” 모시다니…. 내가 누굴 모셔. “포주에게 계약은 이미 끝냈다. 너를 빼 오는데 어마 어마한 돈이 들었지.” 포주? 그 악덕 같은 짐승 놈에게…?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말씀하셨다.” “……???” “너를 고용하신 분의 존함은 서인후 이사님이다.” 그리고 곧 선우기영이란 남자는 일어섰다. 무심결에 지소는 그의 행동을 눈으로 따라갔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뭘… 한다구요?” 원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성격이지만, 지소는 겨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여기 저기 기도 녀석들이 패는 바람에 입 안 쪽은 찢어져서 퉁퉁 부어 있었다. 기영이 그것을 찌푸린 채 바라본다. 그는 스스로가 한심한 듯 작게 고개 저었다. “지소군. 이사님은 너에게 모든 걸 제공하실 수 있다.” “……” “하지만 그 분에 대한 사적인 질문은 안 돼. 그게 여기의 원칙이다.” “……” “먼저 한 가지 정도만 미리 말해주지. 이사님은 네가 모든 걸 망쳐놓기를 기대하고 계신다.” 마지막 말에 머리가 띵해진다. 망쳐놓다니…. 이미 내 인생도 실컷 망가져 있는데…. 남 망칠 여력이 있으면 내가 망가지진 않았겠지. 그러나 기영은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방문을 걸어나갔다. 지소는 미묘한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다음에 들려올 소리를 기다렸다. 터무니없는 가격을 주고 자신과 같은 놈을 사왔다면, 분명 문 밖에서 달칵, 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려야 한다. “……???” 허나, 침묵-. 미끄러질 듯한 깨끗한 마룻바닥과 시원한 창문 밖도 생소하고, 이 호텔처럼 넓은 공간 도 생소하거늘…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지소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며 겨우 일어났다. 욱신거리는 뼈마디와 맥도 못 출 만큼 엉망이 된 몸을 내려다본다. 과연, 기영이라는 남자의 말대로 누군가가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와서 깨끗이 씻기고 게다가 처음 보는 넉넉한 하얀 옷을 입혀놓았다. 그는 거의 발바닥을 도장처럼 찍듯이 살살 걸어서 창문 곁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앞에는 익숙한 자신이 서 있었다. 생소한 밝은 햇살이 하얀 창틀을 넘실거리며 넘어온다. 밝은 빛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거울 속의 청년은 많이 말라 있었다. 게다가 초췌한 몰골은 비교적 깨끗하게 씻겨 있긴 했으나 그다지 눈에 띌 만큼 예쁘지도 않았다. 홀 에서는 가끔 예쁜 녀석들이 손님의 지목을 받곤 했지만, 자신은 그런 재주도 없어서 늘 돈과 몸을 뜯기지 일쑤였다. 어느 정도 키가 자라고 몸이 커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옆구리와 쇄골 부위에는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담배빵들이 흔적으로 남았다. 도망칠 때마다 붙잡혀서 여지없이 구타당하는 바람에 갈비뼈가 부서진 적도 몇 번 있었다. 그 때마다 병원에도 가지 못해서 지소는 늘 더러운 방구석에 오들오들 떨며 누웠어야 했다. 게다가 턱에는 날카로운 칼의 흔적이 보인다. 생기없는 눈동자는 죽은 인형처럼 무의미해보였고, 군데 군데 찢긴 얼굴은 맑은 피부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매력이 없어보였다. 포주는 악독하게도 음식을 잘 주지 않았다. 청년들이 자라면 여자와는 다르게 힘이 세지고 기골이 장대해져 도망가거나 반항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급식의 제한으로 지소는 아직 마음 편하게 많이 먹어본 적이 드물었다. 게다가 또래들보다 조금 말라서, 거울 속의 남자는 곧 쓰러질 것처럼 불안해 보인다. 그는 한참 동안 그렇게 거울 속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길고 느리게 한숨쉬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이 잠깐 동안에…. *** 문은 내도록 열려 있었다. 지소는 인상을 굳히며 나무문에 손을 대었다가 이내 다시 움츠러들었다. 어차피 도망치더라도 또 똑같을지 모른다. 그러니 잠시라도 이 이상한 꿈을 만끽하는 게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기영이라는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새 옷과 음식을 잔뜩 들고 들어섰다. “이사님은 저녁 때 쯤에 오실 거다.” “……???” 눈앞에 진수성찬이 차려지는데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일었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며 기영은 아예 숟가락을 건네며 중얼거린다. “정말 황송하게 만드는군.” “…….” 어린아이처럼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는 모습에 그만 민망해진다. 침대 옆의 테이블에는 지소가 한번도 보지 못한 음식이 놓여졌다. 고소한 향이 나는 죽이었다. “원래 그렇게 말이 없나?” “……???” “아니면 너무 배가 고파서 말을 할 힘도 없는 건가?” 모처럼 기영은 인간답게 웃는 듯 보인다. 그린 듯 반듯하게 올라가는 입술과 정갈한 양복을 쳐다보며 지소는 숟가락질을 망설였다. 말을 할 힘도 없었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게 너무나 생소해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숫기 없고 난처한 성격에, 이것은 정말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이사님에 대한 사적인 질문만 아니라면 던져도 좋아.” “……” 그러나 역시 망설여진다. 그는 자신이 이 모든 혜택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니 이것은 굳이 혜택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거래의 일종이다. 나에게 오는 게 있다면 내가 주어야 할 것도 있다. 또한 역시 예상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기영은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는 지소를 향해 갑갑한 듯 입을 열었다. “역시, 왜 이사님이 너 같은 놈을 선택했는지 알 길이 없군.” “……???” “그 분과 닮았기 때문인가…. 나는 모르겠는데….”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해가 가는 말이다. 누군가를 닮았기 때문에 선택당한다라…. 그것도 자주 있어온 일이니까. “이사님은 작년에 형님에게 약혼녀를 빼앗기셨다.” 드디어 기영은 입을 열었다. 지소는 찢어진 채 부은 입 안 쪽을 혀로 쓸어가며 뜨거운 죽을 겨우 겨우 삼킨다. 귓가에는 단조로운 남자의 음성만이 라디오처럼 내려앉았다. “원래 약혼하시기로 한 분은 재벌가의 딸로 어릴 적부터 이사님과 친한 사이셨지.” “……” “두 분은 유학도 같이 다녀오셨다. 약혼은 거의 기정사실이었고, 설마하니 그 분의 배다 른 형님이 일을 훼방 놓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지.” “……” “이사님의 아버님이자 총수이신 회장님은 파혼에 대해서 마지막 조건을 거셨다. 집안과 거의 의절을 한 채 살아가시는 큰형님이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이사님은 자신의 분할 영역을 빼앗기게 되시는 거지.” 그 때서야 머리가 점점 밝아왔다. 지소는 뜨거운 죽의 김이 헐어버린 입의 점막에 닿는 기운에 소스라친다. 아차 하는 사이에 혀를 깨물어버렸다. 그것을 다시 한심한 듯 쳐다보며 기영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그게 네가 할 일이야.” “……!!!” “이사님의 파트너로서 큰 형님을 돌아오시게 만드는 거지. 한마디로 형님에게서 형수님을 떼어놓아야 한다.” 꿀꺽- 그 때서야 입 안에 있던 것이 겨우 넘어간다. “여자를…” 지소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 목이 화끈거렸다. “여자분을… 유혹하라는…” 그런 말인 줄 알았다, 처음에는. 그러나 기영은 입술 끝만 올라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고개 젓는다. “아니.” “……???” “형님을 유혹하는 거지.” “……!!!” “서로 다 아는 사이끼리 그런 일을 비밀로 하지 말자구. 네 나이가 걸린다는 것쯤은 이사님도 알고 있지만…뭐, 어때. 어차피 넌 그런 놈인걸.” 마지막 말에 지소는 잠시 황망히 눈길을 피했다. 역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팔려온다고 해서 나아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역시…. “하지만 걱정하지 마, 꼬맹이.” 자신의 표정에 기영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님은 유혹하는 척만 하면 돼. 그분들 틈에 들어가서 분란만 만들면 되는 거다. 네가 진짜 만족시켜야 할 분은…” “……” “물론 널 돈 주고 걷어 오신 분이겠지. 안 그래?” 지소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비웃는 기색이다. 한두 번 받아본 눈길도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은 썩 좋질 않았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길러준다- 그러나 대가(代價)는 언제나 잔혹하다. Fighter 1. 불안한 기색으로 눈을 굴린다. 처음 만남은 분명 그랬다. 지소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방문을 열고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온 남자는 표정도 없이 넥타이를 휙 하고 풀었을 뿐이다. “비서가 이야기 안 했나?” 그 때서야, 이 남자가 바로 문제의 이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선가 본 듯도 한 얼굴이다. 굉장히 서늘하게 생긴 얼굴이었는데, 사람을 한번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왠지 분위기를 휘어잡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손님들을 만났지만, 죄다 별 볼일 없는 것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어서 찾아오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 남자는 다르다. 그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만큼 멋진 양복과 핸섬한 생김새였다. 옷에 대해 잘 모르고 지소 였지만 분명한 것은, 이 남자가 매우 돈이 많고 표정없는 눈동자를 가졌다는 점이었다. “내 이름은 서인후다.” 남자는 늦은 밤에 불쑥 찾아와 양복 상의를 벗으며 말했다. 느슨한 태도로 셔츠의 소매를 열며 그는 다소 무료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윤지소라고?” “…….” “요새는 가게에서 말도 안 가르치나 보군.” 대답하지 않자, 그는 지소가 앉아 있는 의자 위로 다가온다. 그리고 갑자기 훅, 강한 손가락으로 턱을 잡아 얼굴을 요리 조리 돌려보았다. “멋진 얼굴인데.” “……???” “형편없이 짓이겨 놓았군. 그 가게 녀석들이 수준이 낮다는 건 알지만, 좀 심한 걸.” 가까이서 보는 그의 눈동자는 어두운 조명 때문에 암흑처럼 새카맣다. 게다가 자신의 얼굴을 물건처럼 마구 손가락으로 돌리는 바람에 지소는 몸이 조금 아플 지경이었다. “…놓고…”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그 때서야 인후는 자신의 턱에서 손가락을 뗀다. 그리고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응시하였다. “목욕을 시킬 때 벗은 몸은 봤지만…” “……!!!” 이 남자가 자신을 목욕시켰다니. 거짓말일 거다. 그는 절대 손에 물 한방울 묻힐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상당히 건조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너무 말랐군. 열 여덟이라고? 또래에 비해서 말랐어. 안 돼. 그런 몸은….” “……” “적어도 우리 형은 적당히 단단한 몸을 좋아하니까 말이야.” 아직 그의 본의를 파악하지 못해서 주저거린다. 의아한 눈동자를 굴리는 자신을 향해 남자는 지겹다는 표정으로 턱을 쓸었다. “벗어.” “……!!!” “품평을 할 시간을 달란 말이지.” 이런 식의 요구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서인후의 표정없는 검은 눈동자는 뭔가 피부를 떨리게 만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 “……” 정말 무슨 품평회를 갖는 기분이었다. 왠지 조금 떨리는 손끝으로 셔츠의 깃을 잡아당긴다. 훅, 하고 열리는 셔츠 자락을 조심스럽게 소매 끝으로 벗어 열었다. 기영이 가져다 준 청바지에 손을 뻗을 때는 복부가 단단하게 긴장했다. 주저거리며 벨트를 열자, 남자는 고급스러운 원목 의자에 몸을 깊숙이 앉히며 담배를 빼물었다. 찰칵, 하는 라이터 소리에도 흠칫 놀랄 정도로 굳게 긴장이 된다. 화려하진 않지만 품격 있는 조명 아래, 자신이 늘 옷을 벗는 공간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환경…. 그러나 지소는 마음을 굳게 먹고 바지를 벗었다. 깨끗한 속옷까지 벗고 완전한 전라로 섰을 때는 무릎 쪽에 약간 무리가 왔다. 손으로 조심스럽게 국부를 가린 채 그의 눈앞에서 발가벗은 모습을 간신히 견딘다. 어딘가 모르게, 몸의 구석 구석을 핥는 듯한 시선에 허벅지가 경련을 일으켰다. “몇 번이나 도망치려 했지?” 남자는 자신의 몸에 잔뜩 나 있는 상처들과 담배빵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울긋불긋한 상처들이 가득 드러난 몸이다. 지소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말없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남자는 비틀린 미소를 살짝 짓는다. “가까이 와.” 다시 힘겹게 발바닥으로 바닥을 누르며 그를 향해 다가선다. 그러자 휙, 하고 바람소리가 나며 손목이 당겨진다. “누가 가리라고 했나.” “……!!!” 남자는 은근히 조롱하는 눈빛이었다. 약간의 모멸감이 들며, 지소는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보일만큼 보인 몸이다. 그런데도 서인후의 태도는 뭔가 자신을 억누르는 듯한 태도가 느껴진다. 몸만 탐하는, 질퍽한 정액냄새가 뇌를 채우는 듯한 그런 사내들과는 또 다르게… 상당히 비즈니스 적인 시각이지만 그것이 오히려 신경을 긴장시킨다. “잘 들어라, 윤지소.” “……” 게다가 남자는 벗은 자신의 몸을 환한 불빛 아래로 잡아끌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난 싸움꾼들이 좋다.” “……”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수 있어. 학교도 보내주고, 친구들도 사귀게 해 주고, 원한다면 얼마든 지 다른 녀석들과 관계를 가져도 좋다. 이 집의 모든 방을 돌아다녀도 좋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 제든지 가영씨에게 이야기해라.” “……” “하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만 성장해라. 알겠나? 교복을 입고, 열 여덟답게 웃고, 적당히 자기 몸도 방어할 정도의 싸움꾼이 되라. 그게 우리 형을 유혹하는 방법이니까.” “……” “그렇지 않다면 넌 필요 없어.” 그리고 문득 남자는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뜨거운 담배 연기와 싸한 스킨 냄새가 같이 어우러졌다. 지금까지 자주 맡던 싸구려 냄새가 아니었다. 뭔가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가는 향기다. 서인후는 그린 듯한 입술을 반듯하게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럼, 테스트를 해 볼까?” “……!!!” “나한테 키스 해.” 남자는 잡아먹을 듯한 눈동자로 말했다. 지소는 심각한 표정으로 굳어 있다가 주춤 주춤 얼굴을 내렸다. 거칠 거칠한 혀가 입술 밖으로 내밀어진다. 쓰윽, 하고 더듬어보자, 남자는 그것을 놀리 듯 가만히 멈춰버렸다. 이후로는 전부 자신의 재능에 따른 문제다. *** 굉장히 뜨거운 것이 살을 가르고 들어왔다. “…으흣!!!” 작은 비명이 튀어나온다. 익숙한 자세이고, 익숙한 행위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그렇다. 지소는 엎드린 채 이불을 꽉 쥐며 고통을 참기 위해 부들거렸다. “…이젠 아예 헐렁하지 않은 척을 하는군.” 그러자 바로 등 뒤에서 모멸감을 주는 한 마디가 떨어진다. 그럼에도 뿌리를 끊어놓을 듯 근육이 긴장해 버렸다. 일단 굵게 들어온 그것의 무게감이 문제였다. 긴 압박이 뜨겁게 내장의 한 부분을 밀어올렸다. 절대 봐 주는 일 없는 관계들을 겪어왔지만, 지소는 무심결에 작게 신음을 흘렸다. “…으응…” 그러자 남자는 갑자기 밀려들어온 페니스를 쑥 하고 빼버린다. 그 탓에 지소는 잠시 바둥거렸다. 인후는 싸늘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자신의 몸을 바로 눕게 만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하다 멈춘 경우는 없었기 때문에, 지소는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왜…”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남자는 거울을 내밀었다. “무릎을 굽혀라.” 반듯한 자세로 누워 무릎을 굽힌 채 들어올리라는 말이었다. 이 역시 자주 겪는 자세였지만,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개는 느물거리는 눈동자나 벌겋게 달아오른 흥분감으로 이런 일을 시켰었다. 아무도 이 남자처럼 깨끗한 얼굴로 무심하게 말한 적은 없었다. 오래된 습성 상 거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지소는 고개를 반만 들고 억지로 쥐어주는 노트만한 거울을 받아들었다. 남자는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들어올린 국부 아래에 가져다 놓았다. “잘 보이지?” “……!!!” “더 벌려라. 양 쪽 손가락으로 이렇게…… 그래야 저 안 쪽까지 제대로 보이지.” 한 손으로 거울을 들어 그곳을 비추게 만들고, 다른 한 손으로 들어올린 다리의 애널을 벌리게 만들었다. 남자의 명령 같은 짧은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떨구자, 아래쪽의 선명한 거울로 자신의 몸이 똑똑히 비추고 있었다. “설명을 해 봐.” 분명 조금 전까지 그도 흥분 상태였을텐데, 남자는 옷을 다시 말쑥하게 입으며 짧게 말했다. 자신만 완전히 벗겨진 상태에서 환한 불빛 아래 거울을 들고 수치스럽게 그곳만을 보며 뭔가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지소는 단단하게 얼어버렸다. 그러나 남자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했다.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라.” “……!!!” “네 몸에 대해 설명해.” 의사에게도 아니고, 자신을 산 사람에게 해야 하는 일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몸을 본 적 없는 지소는 치욕스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주섬 주섬, 거울을 더 가져다 붙이고, 다른 손가락으로 구멍을 넓게 열며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부풀어 있습니다…” 남자는 그 목소리와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씩 웃었다. 얼굴을 자신의 몸과 거울 중간쯤에 붙이며 관찰하는 태도로 차갑게 비꼬았다. “어디가?” “……!!!” “애널이…” 여전히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는 피식 웃었다. “그게 혹시 유일하게 아는 영어 단어인가?” “……” “그런 게 아니라면 정확히 말해.” 입술 끝이 부들부들 떨린다. 거울 안으로는 젖은 구멍이 넓게 벌려져 있었다. 벌건 점막이 조금 벌어진 채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벌렁거린다. 마치 몸 아래에 붙은 입처럼 뻐금거리는 자신의 치욕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남자는 서늘한 눈길로 손도 까닥하지 않고 말했다. “널 다시 가게에 데려다 놓을까?” “……!!!” 엄연히 협박이다. 지소는 파르르 떨리는 입으로 띄엄 띄엄 말했다. “똥구멍이 부풀어서…” “…그래서?” “벌렁… 거리고 있습니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당혹해 한다. 남자는 그것이 재미있다는 듯 냉정하게 씨익 웃었다. 몸의 구석 구석을 탐하는 눈동자였다. 더 바라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입으로 더 치욕적인 단어들을 말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떨리는 손끝으로 단단하게 자신의 몸을 열며 지소는 흐느끼듯 중얼거렸다. “넣어주시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그는 배에 닿을 듯 휘어 있는 자신의 페니스를 가리키며 더 짓궂게 물었다. 그의 손가락이 닿자, 그것이 화들짝 반응하듯 움찔거린다. 말갛게 물기가 세어 나오기 시작한 자신의 것을 바라보며 지소는 이를 악 물었다. “이것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자를?” “……!!!” 그의 거침없는 시선과 질문에 혀가 마비되었다. 그러자 서인후는 신랄하게 웃으며 자신의 아래쪽으로 손가락으로 꽉 눌렀다. “…으읏……” 애써 벌리고 있던 손가락이 경직된다. 가게 손님들 중이 악랄한 녀석이 죄다 깎아 놓은 아래쪽 털이 까슬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인후라는 놈은 나른하게 말했다. “그래서, 네 속을 들여다보는 감상이 어떤가?” 뜨거운 손가락이 계속 아래쪽을 지그시 눌러대는 바람에, 지소는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물고 대답하지 않자, 갑자기 철썩, 따가운 소리가 뺨에서 울렸다. 순간 얼얼할 정도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한번에 대답해라.” “……” “나는 유학시절에 얼마든지 개처럼 놀았다. 네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도 얼마든지 하고 살아왔지. 그러니 괜한 고집은 부리지 마라. 시키는대로 하면, 다치지 않는다.” “…네…” “다시 한번 묻지. 네 속을 보니 어떤 기분이고 너는 어떤 녀석인지 똑똑히 말해.” “……!!!”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고 있을 거다. 그게 너를 선택한 이유야. 그러니 말해라.” 입술이 터질 정도로 꽉 깨물고 있었나보다. 그가 뺨을 때리는 순간, 한 쪽이 찢어져서 야릇한 피 냄새가 났다. 지소는 간신히 입을 벌리며 흐느끼듯 대답했다. “나는 음란합니다……” “……” “그러니 어서 넣어주세요……” 벌겋게 다시 뻐금거린다. 욱신한 감각이 아래쪽을 파고 들었다. 뜨거운 화기처럼 스믈 스믈 허벅지를 기어다니던 음란함이 페니스를 움틀거리게 만든다. 스스로의 속을 열어 거울을 들여다보며, 지소는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넣자마자 착, 하고 손가락에 감기는 주름들이 느껴진다. 안에서 긁듯이 움직이자 말간 음액이 발기한 것에서 조금씩 흘러내렸다. 표정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는 검은 시선에 대고 지소는 허리를 비틀며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다. “넣어주세요……” “……” “여기… 제 더러운 똥구멍에 넣어서 마음껏 찔러주세요……” 그래도 가만히 있는다. 끄덕도 하지 않는 남자를 발정시켜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임무다. 지소는 가늘게 헐떡이며 거울을 둔부 아래에 놓고 손으로 아랫도리를 마구 쓸기 시작했다. “제발…” 그러나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자신의 애널에 침을 뱉었다. “부족해.” 타액과 맑은 정액이 섞이며 물기가 축축하게 손가락에 엉겨붙는다. 그러자 머리 속이 점점 더 멍하게 불타올랐다. 남자는 점점 관능으로 젖는 자신을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 “허벅지와 다리를 움직여서 죄여라.” “으윽……” “더 열심히 손을 움직여. 그래서야 누가 발정하겠나, 안 그래?” 마침내 침대 위에서 온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남자는 손도 깜짝하지 않고 내내 얼굴을 그곳에 붙인 채 앉아 있을 뿐이다. 지소는 손가락을 세 개쯤 찔러 넣었다. 깊숙이, 더 깊숙이 찔러야 안 쪽에 닿는데, 손가락 길이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안을 긁어.” “……으으윽……” “허리를 움직여서 들썩거려라. 남자에게 네가 하는 일이 보이도록 몸을 움직여. 그렇지 않으면 마당으로 끌고 가서 개와 시킬테니.” “……!!!” 머리 속이 점점 멍해지며 그가 시키는 말에 따른다. 마치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구멍 아래 받쳐놓은 거울 위로 점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점점 발기한 자신의 그곳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이대로는 애널만으로 사정하기 힘들다. “아직 안 돼. 거기는…” 허나 손을 페니스에 뻗자 남자는 냉정하게 거두어낸다. “못 참겠으면 말해라.” “……!!!” “너의 그 더러운 곳에 나의 것을 넣어달라고 똑똑히 말해. 사내들의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혼자 거길 넓혀라. 그게 네 일이다.” 지소는 들려진 다리를 넓게 벌리고 구멍을 스스로 적시며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구멍을 벌리고 손가락을 마구 찔러넣는다. 어서 끝내야 한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빠른 시간 내에 사내들을 만족시키는 기술이다. 게다가 점점 더 이 변태같은 행위에 스스로 굴복하고 있었다. 머리 속은 타오르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눈앞에서 붉은 점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지소는 정신없이 그가 명령하는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어서…” “정확히 말해.” “제발……제 음란한 구멍에 주인님의 자지를 넣어주세요…” “더 정확히, 더 강하게.” “아앗……아아…제발……제 음탕한 똥구멍이…너덜너덜 해 질 정도로 주인님의 자지를 넣어서……마음껏 정액을 뿌려주세요.” 그러자 사내는 그 때서야 조금 몸을 움직였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음욕에 사로잡힌 지소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쥐며 그는 조소를 지었다. “더러운 놈이군.”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 끝을 핥는다. 주르륵, 침이 입 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사내는 비로소 자신의 잔뜩 달아오른 페니스를 쥐며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착, 하고 감기는 느낌이 화끈거리며 뇌수를 자극한다. 지소는 반쯤 넋을 잃은 듯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예…저는 더럽습니다.” 남자는 그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혀를 아래로 미끄러트리며 중얼거렸다. “다음번에 다른 놈이랑 시켜도 재미있겠군.” “…으윽…” “거리에서 시키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고…” “…으으읏…” 뾰족하게 선 유두를 잘근 잘근 씹으며 남자는 말했다. “허락할 때까지는 참아라.” “……아…” 이빨을 세워 민감한 젖꼭지를 당기자 몸이 바로 튕기듯 반응한다. “참아.” “……!!!” “허락하지 않았는데 방출하면, 목에 개목걸이를 하고 바로 끌고 다닐 거다.” “…으응…” “예전에도 그렇게 당한 놈이 있었지. 거기가 찢어질 만큼 개한테 당했다.” 지소는 마침내 정신없이 혼자 자위를 하듯 아래를 파고들던 손가락을 꺼냈다. 손가락이 내부의 점액과 자신의 정액으로 온통 미끌미끌하다. 바로 아래 놓여져 남자의 관찰을 도왔던 거울도 온통 젖어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남자의 목에 감았다. 그러나 그 때였다. “이제, 혼자 처리해도 좋아.” 남자는 벌떡 일어섰다. 멍하게 풀린 눈동자로 쳐다보는 자신을 내려다본다. 지소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딱딱한 그것이 덜렁거리며 남자의 시선 아래서 버려졌다. 인후는 그것을 경멸하듯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해볼만한 테스트는 다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지.” “……!!!” “네 말마따나 내가 왜 네 더러운 곳에 박아줘야 하지? 나를 기다리는 놈들이 한 둘도 아닌데?” 머리가 아프다. 허리 아래 일어난 흥분 때문에 머리가 심하게 죄여온다. 울음이 튀어나올 것처럼 당황한 자신을 향해, 남자는 담배를 물며 자켓을 집어들었다. 그는 사무적인 목소리로 덧붙인다. “제대로 개발해서, 나를 기쁘게 만들어라. 윤지소.” “……!!!” “그게 내가 너를 진흙탕에서 빼내온 이유니까.” 그리고 쾅. 문은 절도 있게 눈앞에서 닫혀버렸다. 지소는 몸을 들쑤시는 쾌감의 욕구에 잠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치욕이다. 당할 만큼 당하고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좀 심하다. 그는 정말 자신을 물건이나 사육하는 동물처럼 테스트 한 셈이었다. *** 하긴, 바랄 걸 바랬어야지. 지소는 눈앞에 차려진 아침 식단을 바라보며 표정없이 앉아 있었다. 결국 그 남자, 서인후는 두 번 돌아오지 않았다. 그 자신도 뒤처리를 하지 않아서 꽤나 곤혹스러웠을 텐데…. 그런 남자는 처음 보았다. “안 먹어?” 자신이 음식을 쳐다만보자, 이 집의 집안 살림을 하는 여자가 물끄러미 묻는다. 지소는 그녀와 두 번 째 마주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4층이나 되는 이 넓고 넓은 집에서, 그나마 자주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이사님은 여전히 아침을 안 드셨네….” 그녀는 나이 든 아주머니였다. 지소는 그녀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 건지 짐작이 갔다. 보나마나 다른 사람들처럼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겠지. 그러나 식탁 앞에 정갈한 음식들을 놓으며 아주머니는 통통한 손으로 이마를 한번 훔치신다. “자, 우리 예쁜 학생은 좀 많이 먹어야겠어.” “……!!!” “얼굴은 잘생겼는데 표정이 너무 안 좋아. 그런 건 안 먹어서 그래, 안 먹어서.” 지소는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보았다. 예쁘다라는 말도 생소하고 학생이라는 단어는 더욱 그렇다. 어딘가 딴 세계 같다는 느낌은 그녀의 푸근함에서 더욱 짙어졌다. “몇 살이라고? 열 여덟살? 아이구, 좀 말랐어. 우리 아들보다 말랐어. 많이 먹어, 많이.” “…아들요?” 그녀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맞은 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동네 아줌마같은 태도로 웃으며 손을 젓는다. “그렇지, 우리 아들.” “……” “지금 열 아홉이지. 학교를 다니는데 아주 공부를 잘 해.” “……” “하긴, 이사님이 키웠으니 특히 그래. 이사님은 누군가에게 투자를 하면 아주 혹독하게 키워내니까.” 키우다. 뭔가 그 단어에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숟가락도 들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자, 나중에 김여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여자는 수다스럽게 웃어넘긴다. “이사님이 스무 살이 되면 거액의 유산을 받기로 되어 있었거든. 우리 아들이 다섯 살 때였는데, 그 때부터 이사님이 키웠지. 그 분은 유학을 오래 다녀오셔서 사실 개망나니 같은 생활로 유명했는데…” “……” “그래도 가끔 착한 일을 해. 내가 어릴 때부터 이사님을 봤는데 말이야, 혼자서 무슨 일이든 척척 해 내지. 그래서 회장님도 아무 터치를 못하시지만…” 회장님? 그건 또 처음 듣는 말이다. 물론 어제 그 비서라는 남자가 이야기 할 때도 그런 뉘앙스를 넌지시 풍기긴 했지만…. “회장님 몰라, 회장님? 우리 회장님 K그룹 총수시잖아. 서인용 회장님.” “……” “에고, 정말 모르는 모양이네? 학생은 뉴스도 안 봐? 대한민국 5대 재벌 안에 드는 서철용 회장님을 모른단 말이야?” 알 리가 없다. 아마 TV에서 봤다고 해도 자신과 상관없으니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지소는 조용하게 숟가락을 들었다. “근데 학생은 왜 이 집에 살기로 됐어?” 밥을 한 순간 먹고 김치를 넣는 순간 여자가 말했다. 지소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었다. 팔려왔습니다… 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의미로 말하기도 힘들다. “여기는 이사님의 독채니까 마음대로 놀아도 돼요. 우리 아들도 가끔 놀러오지.” “…독…채요?” “회장님 본가는 경기도에 있어. 한번 들어가는데 몇 번이나 경비랑 마주쳐야 하지. 나도 가끔 심부름으로 다녀오곤 하는데 말이야…”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지소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이구, 기영씨가 웬일이야, 이 시간에?” 기영이라면 몇 번 얼굴을 마주친 그의 비서이다. 꽤 말쑥하고 점잖은 얼굴이지만, 약간의 비웃음 같은 미소를 곧잘 짓는 남자다. 지소는 몇 술 뜨지도 않은 아침을 내려놓는다. 그 모습에 기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왜 안 먹어?” “……” “넌 먹어야 해. 먹는 거 가지고 뭐라고 안 그래.” 왜 이 집안사람들은 전부 자신에게 뭔가 먹이려고만 할까. 역시, 자신이 꼬드겨야 할 그 형이라는 사람이 마르지 않은 몸을 좋아하기 때문에? “학교 다닐래?” 기영은 자신을 향해 대놓고 물었다. 지소는 이 역시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눈을 깜박인다. 학교라니, 초등학교에서 도망친 이후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이사님이 너 검정고시라도 준비하라거든.” “……” “성질 나쁜 놈은 괜찮아도 머리 나쁜 놈은 안 된다…가 이사님의 사고방식이지.” 어쩌면 그렇겠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변태 새끼한테는…. “아니면 이사님께 배우든지.” “……!!!” “그럴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하시더군. 넌 일단 중등과정까지는 검정고시를 쳐야 될 거야.” 지소는 차가운 손바닥으로 얼굴을 훔쳤다. 공부는 해 본 적이 없다. 책을 들고 읽을 만큼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러나 그 이사라는 냉혈한 작자는 자신에게 이것 저것 요구가 많다. “생각보다 적성에 맞을지도 모르잖아?” 그러나 기영은 벌써 책이 담긴 종이봉투를 식탁에 올리며 웃고 있었다. 지소는 다소 난감해졌다. “나는…” 뭔가 이제 서서히 적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쓰레기 같고 오물 덩어리를 묻힌 것 같은 가게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절대 천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가 기회를 줬을 때 놓칠 만큼 자신은 머저리가 아니다. 가게에 다른 녀석들은 수도 없이 넘치고, 자신은 그 중에 한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그의 눈에 들었다면, 열심히 해 봐야 한다. 눈동자에 힘을 주고, 조금씩 생기를 불러일으키며… 지소는 뭐라고 변명을 하려다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기영이 건네주는 책 봉투를 조용히 들어올렸다. 처음에 이 남자가 말했었다. ‘네가 그 분과 닮기라도 했나…’ 라고. 분명히 뭔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자신이 선택된 것이다. 그럼, 나를 바꾼다. 그가 마음에 들어 할 수 있도록…. “점점 생각이 똑똑해 지는 모양이군.” 기영이 자신의 눈빛을 자세히 관찰하며 씨익 웃었다. 그는 이사라는 작자가 밤늦게나 되어야 돌아올 거라고 말하며 일어섰다. “아참…” “……” “네 사이즈에 맞는 옷들을 방에 가져다 놓았다. 계단을 올라가서 복도 끝에 있는 방. 그게 네 방이라는 건 잘 알지?” 이틀 사이에 슬슬 익숙해진 공간…. 지소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게 이곳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렸다. 정원도 넓고, 서인후가 말한 큰 개들도 잔디밭을 뛰어다녔지만 지소는 나가지 않았다. 그는 도우미 아줌마가 가져다주는 죽을 조금 먹었다. 여전히 그녀가 많이 먹어야 한다고 잔소리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몇 술 뜬 것이다. 낮 시간 동안 내도록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는 밥만 먹고 프리한 시간이었다. 지소는 사실 그런 것들에 언제 익숙해질지 의문이었다. “이사님이 오셨어요!” 아래층에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소는 그 소리에 달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망설였다. 저 막 대어먹은 변태 이사놈의 행각으로 보건데, 자신은 이 집에서 키우는 개와 다름없다. 그러니 아마 주인이 오면 꼬리를 흔들며 달려 나가야 할지 모른다. 어제 실컷 두들겨 맞은 개라도 오늘 주인이 오면 반기러 나가듯이…. “오셨습니까.” 남자는 고급 슈트를 벗으며 자신을 힐끔 쳐다보았다. 얼굴만큼은 정말 모델처럼 잘 생겼다. 게다가 탄탄한 몸은 적당한 정장으로 가릴 수 없을 만큼 훤칠하다. 표정은 없지만, 꽤나 많은 여자들을 울렸을 모습이다. 어쩌면 자기 입으로 한 말처럼 ‘어린 시절에 정말 난잡하게 놀았지’가 맞을 지도 모른다. “오늘은 먼저 입이라도 여는군.” 서인후는 자신의 인사를 비꼬았다. 지소는 잠시 시선을 돌리며 마음을 차갑게 굳힌다. 제길,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도록 하지. 다음번에는 나를 밟지 못하게 만들어주면 되는 건가…. “음… ” 자신의 꽉 깨문 입술을 보며 남자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정말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휙, 하고 차갑게 지나치던 행동을 멈춘다. 넥타이를 가볍게 풀며 그는 나른하게 웃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지?” “……” “오늘은 좀 살아있는 놈 같군.” 여전히 물건을 품평하는 듯한 목소리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조금씩 생기가 살아날지도 모른다. 자신을 사람 이하의 것으로 보는 저 차가운 눈길이 끔찍한 까닭이다. 물론 그런 눈길은 충분히 보아왔다. 처음에야 정말 어리둥절해서 포기하고 있었지만 계속 그렇게 되라는 법은 없다. 지소는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됩니까.” 남자가 몸을 슬쩍 뒤로 물리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마음대로.” 그는 적어도 자신보다 열다섯 살은 많다. 저의도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무표정하고, 게다가 도우미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그렇게 잘 산다는 집 아들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다지 현실감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다. 처음의 난처함도 썩 가셔가는 중이다. 어쩌면 오늘 거의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들여다본 책들 때문에 그런지도 모른다. “따로 저와 섹스를 하려는 것도 아니고…” 침착한 자신의 말에 서인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해볼테면 해 봐.’라는 눈빛이었다. 팔짱을 끼고, 다소 피로한 듯 셔츠의 단추 한 개를 풀었다. 그 거만한 얼굴을 보며 지소는 천천히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고 뭐 거창한 짓을 시키려는 것도 아니고…” “……” “당신 비서의 말로는 그저 형님을 유혹하기 위해 나를 산 거라는데…” “……” “언제부터 하면 되는 겁니까?” 처음이다. 누군가를 보며, 손님을 보며 이렇게 눈을 반짝 뜨고 물어보는 것은…. 그동안은 이런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푼돈을 받기 위해, 몇 번 몸 위에서 시큼한 땀냄새를 지저분하게 풍기는 녀석들…, 그들만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계급이다. 그러니 뭔가 다른 방식의 반응이 필요하다. 자신이 선택되었다면,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자유만 준다면,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해 줄 수 있다. 다만, 자신도 그의 저의를 알아야겠다. “언제부터…?” 남자는 자신의 말을 놀리듯 반복하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 마음에 들 때부터.” “……” “활용가치가 있을 때부터. 투자가 정점에 도달할 때부터.” “……” 간단하게 말하던 남자는 조금 귀찮다는 표정으로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깊고 조용한 목소리로 주방에 있는 도우미 아줌마를 향해 말했다. “김여사님!” 그는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인지 모른다. 침대에서는 악랄하고 차갑던 남자가, 몇 년 씩이나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여자에게는 극도로 공손하게 굴고 있다. 정말 예측이 불가능한 남자다. 이십대 시절에 유학을 하며 온갖 더러운 짓으로 놀았다던 남자가, 그 시간 동안에 누군가의 아들에게 공부를 시키며 돈을 투자했다. 이상한 남자다…. “이사님, 왜요?” 여자가 주방 쪽에서 얼굴을 내민다. 서인후는 풀어진 넥타이를 쇼파에 걸치면서 자신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했다. “정원에서 먹겠습니다. 술 한잔만 부탁드립니다.” 그는 그 말만 끝내고 자신이 뒤따라올 거라 믿는 듯 척척척 현관으로 걸어갔다. 지소는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그의 서늘한 등 뒤를 따라갔다. *** “형제가 없지?” 남자는 조용하게 물었다. 지소는 달빛이 쏟아지는 정원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정원이다. 초록의 잔디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고, 잘은 모르지만 조형미가 꽤 잘 살아나는 공간이었다. “저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형제가 있다 해도 모릅니다…. 자신의 대답에 서인후는 작게 웃었다. 투명한 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웃는 모습이 얼핏 인간적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어린 시절에 한창 놀았다- 라는 말을 반증하듯, 그렇게 미소 짓는 얼굴은 조금 그를 악당처럼 보이게 만든다. “형제가 없다면, 부모가 부자가 아니라면, 가족이 없다면 가끔 편할 때도 있지.” 지소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비웃음을 지었다. 물론 고개를 살짝 돌리며 피했지만 말이다. 정말 한가한 소리 하는 남자다. “내 말이 한가하게 들리지?” 남자는 자신의 신경을 긁듯이 곧 되묻는다. 지소는 움찔 놀라며 그를 쳐다보았다. 기영의 말처럼 자신에게 잘 맞는 옷이 바람에 잠시 나풀거렸다. 서인후가 그것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덧붙였다. “너는 믿지 않겠지만, 본질은 똑같다. 강한 놈만이 살아남는 건 어디서나 있는 벌어지는 일이지.” 지소는 그가 내미는 술잔에 고개 저었다. 아무리 몇 술 떴다고는 하지만, 손님이 주는 술을 다 마시다간 속을 버린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탐색하듯이 말했다. “받아라.” “…마시기 싫습니다.” “좋은 말로 할 때 받아. 네가 반항해도 좋은 건 내가 허락하는 대상만이다.” 입술을 꽉 깨물며, 지소는 마침내 잔을 받아들었다. 입 안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것이 가게에서 늘 마시던 술맛과는 뭔가 다르다. 단언하건데, 그의 자세로 보아, 그는 술을 즐길 뿐, 마구 마시는 눈 풀린 술꾼과는 전혀 다르다. 술잔을 받아 조심스럽게 마시자, 남자는 그것을 음미하듯 덧붙인다. “나는 너와 같은 열여덟을 보냈지.” “……” “부모의 미덕이나 교양같은 건 이 세계에서 기대하지 마라. 자신이 원해서 그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경우는 정말 축복받은 일이니.” “……” “가게에서 너에 대해 알아봤다. 친한 놈들이나 원수 같은 기도 놈들도, 그리고 출신 고아원도, 몇 번이나 도망쳤고, 어디서 붙잡히고…” “……”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 어제 말했듯이, 시키는대로만 하면 절대 다치지 않아.” 지소는 그가 자신에게 ‘다치지 않는다’라는 말이 몸을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는 입술을 조금 깨물며 조용하게 대꾸했다. “이미 자존심을 다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예상치 못한 반응이라는 듯 씩 웃었다. “자존심?” “……” “남창에게도 자존심이 있다니 즐거운 대화군. 건방진 놈. 주제에 날 가르치려 들어?”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됐다. 원하는 대답이었어.” 서인후는 처음으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원만 돌아보았다. 여전히 표정도 없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잘생기고 차가운 옆모습은 꼭 선으로 그린 듯 시원했다. 그는 몇 분 후에야 그 얼굴을 돌리며 자신을 응시했다. “내가 널 기르겠다.” “……” “공부를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이 집에서 나갈 때,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싶은지만 결심이 선다면 언제든지 후원해 준다.” “……” “하지만 대가없는 인생은 없지. 나 역시 여기 있는 모든 걸 그냥 얻은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그는 대재벌의 집안에서 마음껏 자란 남자가 아닌가. 지소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날카로운 시선을 감췄다. 그나마 이곳에서라도 와서 더 이상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분에 잠시 들떴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러 녀석에게 구멍을 대주나, 한 놈에게 대 주나 똑같은 일이겠지만…. “원하시는 게 뭡니까.” 차분하게 묻자, 인후는 웃었다. 입가에 깊게 꼬리가 배는 미소였다. “싸워라.” “……!!!” 의외의 대답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 자신이 집중하기 이전에, 기영이나 이 남자로부터 비슷한 말을 들은 것도 같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지소에게 인후는 느긋하게 덧붙였다. “나는 너를 싸우게 만들 거다.” “……” “우리는 자라온 환경만 다를 뿐, 비슷 비슷한 놈들일 수도 있지. 네가 그 놈들에게 얻어터지고 있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뛰어 나와서는 바로 붙잡혀 개처럼 두들겨 맞았지.” 그랬다. 자신의 몸에 칼을 대는 손님 때문에 너무나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그 날도 붙잡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얻어맞았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이 남자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을 경각시키듯 잘생긴 사내는 서늘하게 웃는다. “그런 거다.” “……?” “정신을 잃으면 그렇게 되지. 원하지 않는 상황에 휘말리는 거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뭔가를 포기하거나 체념하게 되는 거고.” “……!!!” “그러니 싸워. 앞으로 네가 만날 모든 사람들 중에서, 너를 산 나를 제외하고는 모든 일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네 생각을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넌 밟혀.” “……!!!” “네가 살아나면, 형에게 보내겠다.” 비로소 들렸다, 그의 대답이. 그리고 뭔가 두근두근 심장을 거세게 두드린다. 고급 양복 정장을 입은 남자는 셔츠를 아무렇게나 팔꿈치까지 걷으며 중얼거린다. “넌 아직 멀었어.” “……” “그 여자에 비해서 자격 미달이다. 그녀는 내가 어릴 때부터 보아온 여자지. 유학생활도 같이 했고.” 그래, 그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녀. 언뜻 언뜻 그에게서, 혹은 이 집을 드나드는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제 3의 생명체, 그녀. “제가… 닮았습니까?” 선우기영이 말했다. ‘그 분과 닮아서 인가’- 라고. 그러나 인후는 단번에 고개 저었다. “그 여자는 너처럼 힘이 없지 않아.” “……” “너처럼 난잡하지도 않고, 너처럼 별 볼일 없는 몸을 가진 것도 아니고, 너처럼 재능이 없지도 않다.” “……” “강하고, 아름답고, 순결해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끔 유혹하듯 웃지. 모든 이미지를 다 조합해서 그녀가 나온다.” “……” 그 순간의 그는 그녀를 떠올리는 눈치였다. 지소는 혀끝에 맴도는 씁쓸한 입맛을 느끼며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남자는 어차피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설령 본다고 해도 아주 싸늘하거나 무심한 표정 외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여자를 떠올리는 그의 표정이 조금은 흐리고 씁쓸해 보였다. 괜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건드린 기분에 지소는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며 정원만 바라보았다. “넌 그 여자의 발가락의 때도 안 된다.” “……” 고개를 숙이자, 목덜미를 잠시 바라보며 남자는 표정없이 말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대로 행동하면 돼.” “……” “그 사람들을 만날 때가 오면 알려줄 테니.” 말을 끝내자 남자는 일어났다. 술잔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고, 안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지소는 그가 일어나서 들어갈 때까지 망연히 앉아 있었다. 어차피 그는 시킨 일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한참을 어렴풋한 불빛에 기대어 그곳에 앉아 있었다. 3. Fighter 씨파. 저절로 욕이 나온다. 지소는 연습장에 수식을 갈겨쓰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정말 어떤 거부터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그다지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부라는 걸 하려고 하니 눈앞이 캄캄해진다. 적어도 2시간 이상은 앉아 있다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벌써부터 몸이 꼼지락거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텅 비다시피 한 큰 집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슬렁 어슬렁…. 조금 어두운 3층 복도를 지나니 방들이 몇 개나 있는 깨끗한 거실에 도착했다. 그러자 불쑥 또 다른 투덜거림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이 건물에는 방이 몇 개나 있는 거야. 덩치 큰 놈들이 우르르 몰려와 살아도 몇이나 살겠다. “오!” 그 때 난데없는 감탄사가 들린다. 분명 김여사라는 도우미 아줌마와 단 둘 뿐인 이 집안에 낯선 사람의 인기척이 들린다. 지소는 본능적으로 날카롭게 뒤 돌아보았다. “네가 새로 들어온 녀석이냐?!!” 등 뒤에는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잘생긴 고등학생이 서 있었다. 고등학생이라고 여겨진 이유는 그가 입고 있는 교복 때문이다. 지소는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그러는 형씨는 누구길래 사람 보자마자 말끝이 짧아져?” 상대 녀석은 자신의 조금 날카로운 반문에 씩 웃었다. 큰 키에 여유만만한 모습이 어딘가 생소해 보인다. 지소는 또래 녀석들 중에 제대로 학교를 다니는 녀석을 본 일이 많이 없었다. “나? 이 집에서 주방 도우미로 일하시는 분의 곱디 고운 아들이지.” 그다지 고와보이지는 않는데…. 생각해보니 아주머니가 말씀하시던 그 고3 짜리 아들이 바로 이 녀석인가 보다. 지소는 연이어 만나지는 낯선 사람들에 난처해졌다. “네가 그 윤지소인가 뭔가 하는 놈이군.” “……” 밝음. 익숙해지기 힘든 세계. 지소는 상대방이 내미는 손을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간 만나온 관계들 중에는 첫 만남에서 호의적인 악수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내가 형이야, 새꺄. 눈 깔어.” 그러자 상대방은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는 한 손에 사과를 들고 있었다. 보나마나 자기 어머니에게 받아온 사과 같았다. 그것을 양쪽으로 힘주어 반듯하게 자르더니 불쑥 내민다. “너 그렇고 그런 일 하다 왔다며?” 젠장, 그렇고 그런 일은 또 뭐냐. “뭘 수줍어하고 그래? 순진한 우리 엄마는 모르시겠지만, 이사님의 취미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취미?” 아무 생각없이 사과를 받아먹는다. 한입 배어물자, 입 안에서 시원한 향이 퍼져 나갔다. 사각, 푸른 사과처럼 희망적인 느낌이다. 사과를 건넨 녀석은 사각 사각 씹어먹으며 밝게 중얼거렸다. “취미지, 취미. 이사님의 독특한 취미.” “……???” “모른단 말이야? 이사님이 이 집안의 입양아이고 18살 때까지 그렇고 그런 일을 해 왔다는 건 누구나 다 쉬쉬하는 사실이라구.” “……!!!” 그래서, 기영인가 뭐시긴가 하는 놈은 이사에 대해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말라고… 사과 녀석은 자신을 흘깃 지나쳐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마디로 밑바닥 인생이지. 집안에서 버림받고 홀어머니에 의해 키워진 그렇고 그런 사람. 입양이 된 건 8살 때였는데, 그 이후로도 이 집에서 나가려고 줄기차게 반항에 반항을 거듭했지.” “……” “이사님이 안 해 본 일이 뭐가 있겠어? 몸도 팔고, 걸핏하면 학교에서 뛰어 나와서 폭주족들하고 어울리고, 그러다가 회장님이 유학을 보내고 빽으로 이민까지 시켜 놓으니, 갑자기 용병이 되어 버렸지.” “…용병?” “외인부대 말이야, 외인부대. 그 전에도 장난 아니었어. 마약에, 여자에, 가끔 남자들도 섞이고, 개판 15분 전이었다구. 거의 일주일에 몇 번은 법정에서 서는 일이 많았지.” 하지만 그는 분명히 20살 성인 때 거대한 유산을 받았다고…. “스무 살 때 유산을 받긴 받았어. 그 덕에 나가서 사는 거고. 그래도 괴기행각은 계속 했거든. 따지고 보면 그런 거 있잖냐, 이 집안은 인격들이 다 썩어서, 뭔가 단단히 방어막을 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거. 이사님이 선택한 게 결국은 그거였어. 밑바닥 인생.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마라!!!… 뭐, 이런…” “……” “이사님의 아버지인 회장님은 정말 아들이 많으시거든. 죄다 어머니가 다른 아들들이지. 그 중에서도 이사님은 집안의 가장 큰 문제아였어. 회장님은 아들들은 거두었지만, 어머니를 버렸기 때문이지. 서인후 이사님은 정말 장난 아닌 10대 20대를 보냈거든.” “내가 취미생활이라는 건 무슨 말이야?” 예리한 시선으로 그의 말을 끊는다. 녀석은 그 때서야 사과의 남은 꼭지 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자신 쪽을 돌아보았다. “이사님의 취미 생활이라고. 밑바닥 인생들을 잘 도우시지. 아마 자기 과거가 겹쳐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 결혼은? 결혼은 왜 안 했지? 그 인간 약혼녀가 있었다던데?” 결국, 그 서인후라는 놈에게는 묻지 못할 말도 이 녀석을 통해서는 들을 수 있다. 지소는 그거라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사과 녀석은 자신의 질문에 머리를 긁적인다. 지금까지 신나게 떠들던 태도와는 다르게 약간 낯선 모습이었다. “약혼녀? 가연이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거군.” “…조선시대냐? 아가씨라고 하게?” “달리 부를 말이 없거든. 하긴 서이사님이 그러다가 정신 차리고 후계자 수업을 받은 것도 가연이 아가씨 때문이긴 한데…” 결국 자신을 구원했던 여자가 자기 형이란 놈과 눈이 맞았다는 거군. 지소는 무표정하게 등을 돌렸다. 어차피 더 알아봤자 좋을 것도 없다. 이 녀석을 제외한 이곳 사람들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도 그런 것이고. 서인후라는 녀석은 인간 윤지소를 독특한 취미생활 겸 이용 수단으로 데리고 온 것 뿐이다. “야, 싸가지!” “……???” 그러나 문득 사과 녀석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 마지못해 귀찮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지소에게 그는 씩 웃으며 젖은 손을 교복 바지에 닦았다. “나, 너 가르치려고 온 거야. 과외 선생으로.” “……!!!” “나도 이사님 때문에 편하게 공부해 왔거든. 그러니 뭔가 쓸모 있는 일은 해야지.” “…나는…” 선생같은 건 필요없어- 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보다 빠르게 녀석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성우민. 앞으로 꼬박 꼬박 선생님이라고 안 부르면 네 그 싸가지 없는 엉덩이 껍질을 벗겨낼 줄 알아.” “……” 조금 더 험악하게 노려보았지만, 우민이라는 녀석은 씨익 웃었을 뿐이다. 과외 선생이라고? 그런 게 왜 필요하지? *** 왜 과외 선생이 필요한지는 일주일 뒤에나 알 수 있었다. 달리 어디 갈 때도 없고, 그렇다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는 지소는 욕조에 앉아 있었다. 마치 늘어진 좀비 마냥 물 속에 잠겨서 팔을 한 쪽만 늘어뜨리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서인후라는 놈과는 며칠 동안 마주치지 못했다. 아침 나절에 자신보다 먼저 출근하는 것으로 봐서는 집에는 꼬박 꼬박 들어오는 것 같은데, 그 시간이 새벽을 넘길 때도 가끔 있었다. 운전과 비서를 같이 하는 기영이라는 놈이나 혹은 도우미 아주머니, 마지막으로 자신이 곧 죽어도 과외선생이라 우기는 우민을 제외하고는 집에 드나드는 인간도 별로 없었다. 지소는 오히려 이 상태가 낫다고 생각했다. 인후라는 사람은 그다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볼 꼴 못 볼 꼴 다 지내온 자신이라 해도 그런 종류의 변태 녀석과 마주치는 것은 꽤 고역인 것이다. “굉장히 한가해 보이는군.” 그러나 녀석은 어느 날 불쑥 이른 저녁에 들어왔다. 지소는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녀석은 셔츠에 넥타이 차람이었다. 지금 막 퇴근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마침 알아서 씻어주니 고마울 지경인걸?” 얼굴을 보자마자 냉랭하게 말한다. 지소는 작게 한숨을 쉬며 턱 아래까지 찰박이게 몸을 담궜다. “이 시간에 웬 일이십니까?” 그 때 자신을 실컷 괴롭힌 사건을 제외하면 이 방에 몸소 찾아온 적도 없었다. 지소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욕조에서 일어섰다. 수건을 향해 팔을 뻗자,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인지 알아서 건네준다. “준비하고 나가자는 말을 하러 왔지.” “……???” 자신은 그가 키우는 짐승이 맞다. 그러니까 그가 가자고 하면 가야하고, 오라고 하면 와야 하고, 짖으라고 하면 짖고, 기라고 하면 기어야 한다. 그게 이 모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 이 부자 녀석의 특권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어디로, 어떻게’나가자는 말인지는 알았으면 좋겠다. 멀뚱한 시선을 짓자, 인후는 어깨를 으쓱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 것 같군.” “……” 벗은 몸을 수건으로 닦는 사이 튀어나온 한 마디다. 지소는 몸의 물기를 대충 닦으며 따끔하게 쏟아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몸 따위에는 관심없다고 분명히 못 박았다. 그가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든, 목적의식 외에는 거의 없는 남자가 분명하다. “아버지라는 작자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윤지소.” 그러나, 그 때 서인후가 말했다. 지소는 본능적으로 젖은 얼굴을 휙 하고 돌렸다. 인후는 적어도 180이 넘는 키였다. 훤칠한 체격과 단단한 몸이 입구를 버티고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더군다나 그가 꺼낸 말은 그의 몸 만큼이나 위협적인 기분이었다. “아버지요?” 의심스런 눈길로 묻자, 서인후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늙은 호랑이지.” “……” “긴장할 필요 없다.” 그리고 왜 였을까. 지소는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긴장? 처음에 어안이 벙벙했을 뿐, 또 맥이 빠져서 기진맥진하고 사태를 알 수 없어 말을 아낀 것이지만 긴장한 적은 없었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긴장요?” 수건을 허리에 걸고 남자의 몸을 조금 밀어냈다. 그러나 남자는 팔짱을 끼고 모처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길. 자신도 작은 키가 아니다. 178cm 는 되는 장신이다. 이곳 사람들이 자신을 말랐다고 구박하지만 그래봤자 호리 호리할 정도다. 포주 녀석이 밥만 잘 줬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이번에는…” 지소는 무표정하게 남자를 향해 말했다. “이번에는 발가벗겨서 아버님 앞에 데리고 가실 겁니까?” “……” “목에는 개목걸이를 하고요?”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자가 씨익 웃었다. 태어나서 서인후가 저렇게 웃는 것은 처음보았다. 물론 자주 마주치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지소는 자신이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했던가, 라고 잠시 반문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 아니라, 그의 삐뚤어진 방식을 비난하는 말이었다. “그것도 재미있겠군.” “……!!!” 서인후가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더더욱 비켜줄 생각이 없다는 듯 몸을 조금 움직여 입구를 꽉 막는다. 지소는 길고 느리게 한숨쉬었다. “아예 개랑 교미하는 걸 아버님께 보여드리죠? 회장님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 게 당신 소원이라면.” 그런 말을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했던 게 문제였을까. 남자의 눈이 한번 반짝였다. 지소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망할 놈의 변태 새끼가 또 어떤 식으로 변덕을 부릴지 염려가 된다. 특히나 저 눈동자가 더 검어지며 깊어질 때는… “……!!!” 그리고 순간적으로 머리카락이 당겨졌다. 젖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 섬유질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빠르게 남자의 손으로 엉켜서 당겨진다. 본능적으로 신음이 나올만큼 거센 손길이었다. 순간적으로 억센 힘 때문에 욕설이 나오려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인후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서 나른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내가 주워 온 것은 인형이 아니군.” 녀석은 노곤한 눈웃음을 지으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러자 성우진이 했던 말들이 저절로 그의 얼굴과 겹치듯 떠올랐다. ‘안 해 본 게 없지. 남창에 마약에, 폭주족에 용병까지. 남과 자기를 파괴할 만한 일은 다 해 봤을껄.’ 어쩐지…. 그냥 호락 호락 부자집에서 자란 고급스런 남자의 느낌보다 더 위험한 시선이었다. 입술이라도 물어뜯을 듯 가까워진 얼굴이었지만, 또한 색기가 조금은 엿보이는 노곤한 시선이었지만, 서인후는 단정하고 차갑게 말했다. “만약 인형이라면 다시 갖다 버리려고 했지.” “……” “방금 잘 했다, 윤지소.” “……!!!” 믿을 수 없다…. 남자가 자신을 칭찬했다...하지만, 도대체 뭘로? “그게 내가 기다리던 말이다.” “……” “방금 네가 나를 비꼬았듯이, 그렇게 아버지를 대해. 내 가족들에게 그렇게 해도 너는 아무런 피해를 안 입는다.” “……” “아니, 가족들 뿐만 아니라,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반항해라. 단, 네가 네 주인이 누군지만 잊지 않으면 상관없지.” 잡혀 있는 앞머리가 아팠다. 남자는 분명 힘도 들이지 않고 살살 잡은 듯한 손길이었는데, 잡혀 있는 쪽은 머리가죽이 벗져질 듯 아파왔다. 저절로 인상이 찡그려진다. 그러자 서인후는 그것을 보면서도 씨익 웃었다. “비명을 질러.” “……!!!” “죽은 척 하지 마라. 네가 힘 빼고 너 혼자 약자라고 여기고, 피해자라고 우겨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 “네가 서 있는 땅은 남을 연민하기에도 바쁜 땅이다. 자기 연민에 빠져서 초라한 인형인냥 우기지 마.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지소는 마침내 바둥거렸다. “놔…” 희미한 그 말에 남자의 입 꼬리가 더욱 짙어진다. 그러나 자신의 반항과는 반대로 잡은 손길은 더욱 세졌다. “욕을 해.” “……!!!” “욕을 하고 싶잖아. 이제 열여덟이 왜 그렇게 공손하게 살아가지? 말도 안 되지, 윤지소. 네가 너를 가지고 온 이유는, 네가 천하고 난잡하기 때문이고, 그게 내가 원하는 거다.” 갑자기 머리 속이 쿵쿵하고 울려댄다. 머리채가 뽑혀 나갈 듯한 통증도 그러했지만, 남자의 말이 어딘가 다분히 이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싸한 기분이 얼음처럼 척추로 녹아들었다. 문득 혈관 곳곳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그래, 그것이었다. 이 녀석이 자신을 테스트 한답시고 정말 뒷골목에서 자신이 배 나온 녀석들을 상대하며 길들여진 말들… 그것을 꺼내게 했던 이유는 단지 그것이었다!!! “개새끼.” 그렇게 생각하자 드디어 욕이 나왔다. 남자는 그러나 더 해보라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지소는 문득 목덜미까지 붉어지는 당황과 짜증이 느껴졌다. 나에게 더러운 출생을 기억하게 만드려는 이 저질스러운 태도!!! 문득, 생각지도 못한 욕이 마구 마구 튀어나온다. “개새끼!!!” “……” “놔!!! 이 변태 새꺄, 이 좆같은 새끼, 씨발놈, 엄창 새끼!!!” 그러나, 온갖 욕설에도 서인후는 또렷하게 입술을 열었다. “잘 하고 있다.” “……!!!” “이게 너니까.” “……” “그게 우리니까, 남창소년. 그게 우리 혈통이야.” 무슨 말인지 몰라 조금 강하게 노려보자, 남자는 여전히 차갑게 웃으며 그제야 손을 놓는다. 그리고 느긋하게 웃으며 뒤로 돌았다. 이미 지소의 몸에서 뜨거운 물기는 말라 있었다. 욕실의 화한 수증기와 겹쳐져 뭔가가 피부의 온도를 약 0.5도 높여놓은 것만 빼면. “더러운 피, 나쁜 피…” 남자는 뭐가 그렇게 만족스러운지 조금 웃으며 말했다. “고상한 척 하지마라, 윤지소.” “……” “나쁜 피는 끓는 피다. 피가 끓으면 이 냉혈한들의 사회에서 그 사람들의 위선을 벗길 수 있지.” 그의 탄탄한 등을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어떤 손님보다 더 악질이다. 기껏 자신의 처지를 잊으려고 체념하며 살았는데, 모든 상황을 완전히 유토피아처럼 바꿔놓고도 자신을 철저히 농락한다. 부자들의 동네로 주워졌지만, 자신이 주워졌음을 절대로 잊지 마라- 라는 말. 지소는 눈이 아플만큼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서인후는 입가의 미소를 지으며 엄격하게 뒤돌아섰다. “선우비서가 잔뜩 사다놓은 옷들이 있으니…” “……” “네가 입고 싶은대로 입어.” 결국 옷은 입혀서 데리고 간다는 말이군. 여전히 강한 눈길로 노려보자, 인후는 여유있게 웃었다. “기대하고 있도록 하지.” 그러자 문득… 전혀 생가지도 못하게 지소의 마음속으로 외침이 하나 지나갔다. 누가 질 줄 알아?- 라고. 그렇게 떠올려 놓고도 스스로 난감해서 재빨리 혀를 깨물었다. 누가 질 줄 알아- 라니. 열두 살 이후로 자신에게는 체념과 포기만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른 방식의 감정이 찾아온다. 지소는 자신이 18년 동안 만들어졌던 그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4. Fighter 정확히 말하면 2살쯤에 버려졌다. 지소는 조용하게 미끄러지는 차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사진이나 이렇다 할 기념품 같은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를 버리듯, 한 포대기에 담겨서 버려진 것 외에는 단서라곤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영아원에, 그리고 조금 더 나이를 먹어서는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 시절에 친했던 녀석들도 있었을 것 같은데… 아마 12살 때 부모님 참관 수업을 계기로 뛰쳐나왔던 것 같다. 거리를 헤매고, 거리에서 자고 먹고 구걸하는 생활을 하다가 그 개새끼같은 포주 놈을 만났다. 처음부터 그런 일을 했던 건 아니다. 자신은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다. 더군다나 착하셨던 수녀님 아래에서 교육 받아온 자신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긴, 그러면 뭘 하나… 이미 거기가 헐만큼 익숙해져 있는데…. 겨울이 좀 더 춥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혹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이렇게 살지 않았을까. 가끔은 살다가 그 겨울의 차가운 거리와 신문지를 돌돌 말고 자던 그 기억들이 오히려 그리운 것은, 뭔가를 잊고 살았기 때문인가. 내가 언제 그 가게로부터, 그 악랄한 포주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을까. 도망가면 갈 곳도 없는데… 사실은, 다시 붙잡힐 것을 알면서도 매번 똑같은 탈출을 꿈꾸었다…. “…뭘 생각하지?” 불현듯 예전 일들이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 생소하게 바뀐 환경과, 한편으로 태어나서 거의 처음으로 뭔가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기분 탓이다. 지소는 몸을 조용하게 뒤척이며 고개 돌린다. 옆 자리에 잡지모델처럼 늘씬하고 탄탄한 체격을 뽐내며 남자가 앉아 있었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답하지 않는다. 그가 알아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는 생각이다. 남자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서늘하게 웃으며 한 마디 다시 던진다. “정말 옷차림이 마음에 드는군.” 망할 비서가 가져다 놓은 옷 중에 가장 불량스러운 옷을 꺼냈다. 사실, 말쑥한 차림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다. 교복도 입어본 적이 없다. 예전에 그 뒷골목의 오토바이 수리 센터에서 일하던 놈이 학교를 자퇴했었는데, 그 놈에게 딱 한번 교복 비슷한 걸 빌려 입어보고는 땡이었다. 그 교복, 포주 놈에게 걸려서 걸레처럼 찢겼다. 그게 자신의 모습 같아서 지소는 떠오르자마자 세차게 고개 저었다. “당신이 원하는 이미지라면… 이제 혀에 구멍만 뚫으면 되겠지.” 조용한 대답에 서인후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과연 그랬다. 한 쪽 귀에는 은색 링을 달고, 머리카락은 천박할 정도로 화려한 금발이었다. 마구 쭈삣거리게 세워놓은 머리스타일과 고 나이 또래 녀석들이 가장 많이 입는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정확하게 뒷골목 녀석같은 셔츠는 품위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낯빛이 조금 창백하다는 것 외에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영락없는 남창이다. 닳고 해진 놈은, 목덜미만 봐도 난한 색기가 흐른다던데…. 지소는 웬만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이 집안 사람들이 한 눈에 자신을 알아볼 거라 여겼다.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서인후는 자신이 더 그렇게 행동하길 원하는 눈치였다. “말투도 점점 마음에 드는군.” 과연, 인후는 웃었다. 그러나 참 인간미 없는 웃음이다. 차갑고 딱딱하기 그지없는 미소다. 나오기 전에 욕실에서 잠깐 보았던, 입가로 환하게 퍼지며 눈에서 나른한 색기가 풍기는 수컷같은 느낌은 전혀 없었다. 아마, 그 때 자신은 배고픔과 수증기 때문에 잠시 눈에 헛것이 보였는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래?” 이젠 아예 대놓고 형식도 없이 묻는다. 싸가지 없는 그 말투에도 오히려 흡족한 듯 인후는 조용히 대답했다.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 “…지금이 뭔데?” “지금처럼 태생답게 굴면 된다는 말이지.” 지소는 침을 삼켰다. 목이 좀 칼칼한 기분이다. 그는 손가락을 머리카락에 꽂아 아무렇게나 넘기며 작게 야유를 보냈다. “당신이 내 태생을 알아?” 왜 그럴까. 명치가 아파온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기분이다. 경멸과 멸시, 혹은 혐오와 조소… 그러나 그래놓고도 남 후장이나 따먹을 때는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들던 녀석들이다. 정말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지만, 지소는 처음 강간을 당하던 날, 빵을 허겁지겁 먹으며 그의 말대로 뒷구멍을 열어주고 있었다. 아직도 생각난다. 정신없이 흔들리던 몸과, 꼬치처럼 남근에 꿰어서 넓게 벌려져 있던 자신의 다리…. 힘없는 줄에 달린 인형이 그렇듯, 발목이 관절만 남은 듯 마구 놈들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빵을 씹을 때마다, 침이 입가로 흘러내렸고, 식도로는 음식이, 항문으로는 정액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선명하다, 몸 아래 고통과 허기 중에 뭐가 더 급했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허기였다. 그게 태생이란 것이다. 맞을 놈은 맞을 짓을 하고, 약한 놈은 약한 놈으로 태어나는 것. 서인후의 말대로라면 그런 게 태생이라는 거다. 씨발, 좆같다. 지소는 표 나지 않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창 밖으로 고개 돌렸다. 차가 어두운 수풀을 지나 언덕을 넘고, 조용한 시골길을 가는 듯 말이 없었다. “다 왔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들을 태운 고급 승용차가 정말 조용하게 아주 큰 철제 대문을 통과했다. 대문은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리며 검은 승용차를 반기는 듯 보인다. 지소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 큰 대문이 마치 커다란 괴수의 아가리처럼 보였던 건 단지 착각이었을까. *** "오셨습니까.” 누군가 현관문을 열며 말했다. 그 틈에 재빨리 주변을 돌아본다. 이 또한 묘한 분위기다. 이곳은 모든 게 지나치게 넓고, 화려하고, 그리고 고요했다. 내부는 넓은 한옥식으로 된 집이었으나 거의 4층은 넘어보였다. 마룻바닥을 걸을 때는 윤이 날 정도로 잘 닦인 그곳에 날파리도 넘어질 정도라 여겼다. 서인후는 문을 열어준 남자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문을 열어준 이는 대략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로, 검은 양복을 입고 굉장히 깔끔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지소 쪽을 힐끔 쳐다보더니 무심한 목소리로 낮게 덧붙였다. “모두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인후는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정후 도련님만 제외하면요.” 정후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인후의 비웃음이 더 짙어졌다. “오려고 해도 못 오는 거겠지.” 서인후의 양복 자켓을 받아들며, 남자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지소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라 낯선 공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실내의 값비싼 가구들조차도 죽은 듯 생기가 없는 공간이었다. *** 그들이 들어선 곳은 식당처럼 보이는 넓은 방이었다. 좌식으로 되어 있으나 상 아래 쪽이 참호처럼 트여 있어서, 굳이 양반다리를 하지 않아도 좋을 공간이었다. 공간의 뒤로는 병풍이 쳐져 있고, 대략 5명 정도의 젊은 남자들과 두 서명의 여자가 섞여 있었다. 상석에는 머리가 이제 막 희끗해지는 남자가 날카로운 눈으로 방금 들어선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드디어 등장했군.” 지소는 서인후가 앉는 옆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좀 더 조심스러운 성격이었으나, 그런 태도는 서인후가 암묵적으로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석에 앉은 흰 머리의 잘생긴 중년 사내는 자신 쪽을 차갑게 쳐다보며 냉정하게 말했다. “이번엔 또 뭐냐.” 그 때서야, 지소는 그가 서인후의 아버지, 그리고 그들 집안의 가장 웃어른인 K그룹의 총수 서인용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의 좌우에 앉아 있는 이들이 이 집안의 아들들과 딸이라는 것도 넌지시 짐작이 갔다. 그만큼 그들은 조금씩 닮아 있었다. 외모적으로 뛰어난 것을 넘어서서 어딘가 유리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더욱 그렇다. “저 냄새나는 것은 치워라.” 서인용의 한마디가 매섭게 떨어졌다. 그러자 조용하게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길이 동시에 지소 자신을 향했다. 그 때서야 지소는 이 공간에서 가장 환대를 받지 못하는 존재가 스스로임을 깨달았다. 방금 서인용이 말한 ‘냄새나는 것’은 바로 자신을 향한 말이었다. 지소는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시에 서인후로부터 계속 자극받는 미묘한 반항기질도 불쑥 튀어올랐다. 지금 나에게 저 머리 희끗한 양반이 냄새나는 것이라 했단 말이지…. 그러는 저 인간도 자신이 넓게 다리를 벌리고 짐승처럼 부들거리면 오물 같은 몸에 육봉을 처박고 헐떡거릴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자 피식, 묘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서인후도 자신과 마찬가지 태도였다. 그는 아버지의 차가운 비꼬임에도 상관치 않고 젓가락을 들다가 자신을 한번 건조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때서야 생각났다는 듯 조용하게 대답한다. “아들의 결혼 상대에게 너무 말씀을 막 하시는 건 아닙니까?” “……!!!!!!” 너무나 서늘하고 조용한 한 마디…. 그러나 숨이 막힐 정도로 어이없는 그 대답…. 지소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눈살을 찌푸린 채 서인후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인후는 젓가락을 들어 생전 본 적도 없는 음식을 집어올렸을 뿐이다. 한참을 눈알이 떨어질 듯 노려보던 회장이 급기야 서릿발같이 무게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 때까지 이상한 정적만 실내에 가득찼다. “미쳤군.” 서인후는 그 말에 표정도 없이 고개를 들었다. “당신의 아들인 것부터가 미친 일이지.” 그것은 지소가 생각하는 가족간의 저녁식사와는 품격이 달랐다. 뭔가 두근 두근 거리게 만들고 손바닥 안으로 땀이 촉촉이 차올랐다. 그들 중에 젓가락을 들거나 작은 은기 술잔을 들어 식사를 음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검은 옷을 입고 모두가 검은 넥타이를 한 채 한 무리의 인형처럼 표정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직 서인후 만이 적빛의 넥타이를 맨 채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기일이라고 해서 억지로 모두 부른 모양인데…” “……!!!” 어머니라니…. 지소는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더군다나 기일이라니…. 그러나 서인후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조용하다. “그 어머니라는 여자는 당신의 정식 부인일 뿐이지, 내 어머니가 아니야.” 그 말을 듣자 얼음을 끼얹은 듯 정신이 바짝 든다. 그러니까, 오늘 이 집에 서정후라는 사람을 제외한 가족들이 모인 이유는 오직 하나, 서인용 회장의 전처이자 정식 부인의 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제까지 들은 말에 의하면 ‘제각각 어머니가 다른’ 이들 형제들이 오묘한 분위기로 인형처럼 앉아 있는 이유도 역시 그 때문이었다. 지소는 그 때서야 그가 왜 자신의 옷차림을 마음에 들어했는지 깨달았다. 이 기일의 형식에 맞지 않는 행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신이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던 것이다. 순간, 짓누르는 듯한 이 분위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꽉 채운다. 서인후를 비롯한 이 집 식구들 중 누구도 자신의 편은 없었다. 지소는 서인용 회장이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자신의 아들이 보이는 저 막대먹은 태도, 그것을 뒤엎어 쓸 대상이 바로 자신이었다. 냄새나는 쓰레기인 자신이다. 그리고 역시 그랬다. “그래서 너는 저 남창 녀석과 결혼한다고?” 회장은 그런 웃기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는 듯 씩 웃는다. 상당히 역겹고 잔인한 미소였다. 그에 비해 그의 아들은 아버지와 정확히 반대 되는 방향에 앉아서 표정도 없이 냉정하다. “남창이라니.” “……” “당신이야 말로 아들이 결혼할 상대에게 전혀 예의를 모르는군.”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졌다. 지소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흐렸다. 결혼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다. 누가 누구랑? 정말 말도 안 된다. 서인후는 미친 게 분명하다. 이 저질 변태 새끼는 정말 미친 것처럼 지극히 무심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반면 저 너머의 회장은 술잔을 꽉 쥔 채 손마디가 부들 부들 떨리고 있다. 지소는 난처해지고 웃겨지는 자신의 상황에서 서인후의 옆모습만 기가 찬 눈으로 쳐다볼 뿐이다. 그 때 날카롭게 곤두서는 신경줄을 끊고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진작에 네가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다만…” 회장의 가장 오른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마흔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나이에, 조금은 우유부단한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끝은 이 집안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차갑고 냉랭했다. “K금융과 호텔의 지분을 가진 이사가 남자와 결혼한다고 하면 난리가 날 텐데….” 서인후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그 남자를 향해 고개 돌린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형이 P제지의 외동딸과 결혼한다고 했을 때처럼 조용히 넘어가진 않겠지.” 그렇다. 이 험악한 자리에서 그래도 입을 연 저 남자는 서인후의 몇 번째 인지 모를 형인 것이다. 지소는 점점 이 식사가 한심해 지기 시작했다. 턱도 없이 남창에다, 쓰레기에 냄새나는 것으로 취급받다가, 미쳐 버린 주인이 자신과 결혼한다고 말하는 것도 웃기고, 그 말을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재벌가의 형제나 회장도 웃겼다. 그러나 함부로 웃을 수는 없는 분위기였다. 서인후가 침착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턱에 깍지를 끼고 서류를 결제하듯 사무적으로 말한 것이다. “언제부터 이 집안 식구들이 내가 누구와 결혼하는지 이렇게 관심이 있지?” “……” “내가 마약에 찌들었을 때는 마약쇼크로 죽길 바랬고, 내가 남자들에게 몸을 팔 때는 에이즈로 죽길 바랬고, 내가 용병으로 SAS에서 근무할 때는 총에 맞아 죽길 원했으면서 말이야.” 그때 지소는 분명히 보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재빨리 아래에 놓여진 음식을 향하고 말았다. 오직 한 사람, 서인용 회장만이 뚫어질 듯한 눈동자로 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인후는 서늘하게 웃으며 그들을 조롱하듯 말했다. “난 미치지 않았어.” “……” “내가 누군가와 결혼하겠다면 결혼하는 거지. 당신들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어.” 그러자 서인용 회장의 손이 경기라도 일으킨 듯 크게 한번 떨렸다. 그리고 불쑥, 갑자기 정신을 차렸을 때, 회장의 손에서 한번 크게 휘둘러진 술잔이 서인후의 말끔한 얼굴에 가서 차갑게 부딪쳤다. 그러나 술을 얼굴에 뒤집어 쓴 서인후는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서인용만이 크게 동요하는 기색으로 겨우 겨우 탁자를 지탱하며 일어선다. 병풍의 앞에 서 있던 몇 명의 남자가 재빨리 다가와 그를 일으켰다. “괘씸한 녀석……” 회장의 차가운 한마디에 인후가 불현듯 씨익 웃는다.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나가려는 서인용의 등 뒤에 대고 인후는 지금까지 지소도 들어보지 못한 싸늘한 말투로 차분하게 말했다. “한번쯤은 당신도 아버지 역할을 하고 싶겠지?” “………” “그럼 어서 죽어버려.” 움찔. 지소는 잠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 말을 할 때의 서인후의 눈에서 번뜩이는 사람 아닌 불빛 때문이었다.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마치 공포 영화처럼, 서인후의 그림자는 악마의 뿔을 두개 달고 있는 형태일 것 같았다. 그런 생생한 환상에 소름이 끼칠 무렵,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른 식구들은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서인후의 그런 잔인한 말과 태도가 꽤 익숙한 기색이었다. *** 서인용 회장이 심장을 움켜쥔 채 뭐라고 뭐라고 욕설을 내뱉으며 나간 자리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지소는 그 자리에서 누구도 자신들의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음을 보고 크게 놀랐다. 가족을 가져 본 적도 없는 자신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분위기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이렇게 조용하고, 이렇게 서로를 증오하는 듯한 분위기는…… 가게 안에서도 찾기 힘든 정서였다. 뭔가 표현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서로를 경계하는 시선들이었다. 그리고 아주 한참 후에야 장시간의 침묵을 끊고 누군가 말을 꺼냈다. “아버지 앞에서 괜히 꺼낸 말인 거 안다.” 그 남자는 서인용의 왼쪽에 앉아 있던 남자였다. 오른 쪽에 앉아 있던 남자가 첫째 형이고, 이 남자가 둘째 형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지소는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때는 정신도 없었지만……. “괜히?” 서인후가 둘째형의 말에 조소를 지었다. “내가 한번이라도 괜히 꺼낸 말이 있던가?” “……” “그건 형들이 잘 하는 짓이지. 아부와 아첨용으로……. 그래, 그렇게 했으면 할아버지가 형들에게 재산을 더 많이 남겨주실 줄 알았을텐데 말이야.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골고루 유산이 가게 만드셨다는 걸 아무도 눈치 못 챘지. 그 때도 내가 경고했어. 난 괜한 말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아. 시간 낭비거든.” 그러자 셋째 형이라는 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가 셋째형이라는 것도 지소는 훨씬 이후에나 알게 되었지만……. “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우기는 건, 가연 씨 때문에 그러냐? 정후 녀석이 잘못한 건 안다만……” 또 나왔다, 그 이름. 가연이라는 여자의 이름. 무슨 가연인지, 왜 서인후를 버렸는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서인후에게 가연이라는 여자를 뺏어간 형의 이름이 서정후라는 점이다. 지소는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며 눈꼬리 끝으로 서인후를 관찰했다. 길고 깨끗한 손가락이 머리카락 위로 올라간다. 그는 쓰윽,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셋째형에게 웃음 지었다. “가연이랑 정후 형이랑 결혼한 게, 아니 둘이 도망간 게 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이건가?” “……” “이 집안은 해를 거듭할수록 웃기는군.” 서인후는 소리나지 않게 비웃으며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내가 미쳤다는 건 진작에 알고들 있지 않았나?” “……” “그래서 붙여주려 했겠지. 상대 재벌 회사의 귀한 딸이지만 말을 할 줄 모르는 그녀랑 말이야.” “……!!!”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지소는 깜짝 놀란 눈으로 서인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인후는 표정도 없이 술을 깨끗이 비우고 다음 잔을 채운다. 그 때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일어나 자신의 등 뒤로 다가왔다. “그건 형이 자꾸만 더 망나니처럼 굴기 때문이야.” 지소는 나중에야 그가 서인후의 유일한 동생뻘인 서윤호라는 걸 알아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럴 경황도 없었다. 자신은 아직 여기 앉아 밥을 먹기도 전에 연이은 공격과 충격에 휩싸였는데, 뒤로 다가온 남자는 서인후 못지 않은 삐딱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 것이다. “환상적인 결합이잖아.” 서윤호가 말했다. 서씨 그룹 재벌가의 7번째 아들이자 유능한 엘리트 출신인 서윤호였다. 그는 자신의 형을 웃기다는 기색으로 바라보며 유유하게 말했다. “형도 별 말 안 했잖아. 정략결혼을 하는 재벌가의 정신병자 아들과 다른 재벌가의 벙어리 딸 말이야.” “……” “어울리는 그림이지. 양 쪽 집안 전부에서 골치거리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그 여자 덕분에 형이 조금은 정신을 차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가연이 누나가 정후 형이랑 도망을 갔겠어? 정후 형은 제정신이거든.” 서윤호는 자신의 형인 인후보다 훨씬 빈정거리는 얼굴이었다. 지소는 이 집안의 대화가 모두 이런 식이라는 것을 마침내 이해했다. 여기서는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다. 그래도 처음 들었다. 그렇게 안 해 본 것 없이 완벽하다는 서인후가 집안에서는 거의 미친놈 취급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그 가연이라는 여자가 말을 못한다니…. 지소는 그런 말을 이렇게 싸가지 없게 꺼내는 가족은 처음보았다. 이런 가족이라면 없는 게 낫다는 생각이 얼핏 들 정도였다. 그리고 서인후가 과연 자신을 향한 저 잔혹한 말들에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인후는 그 말에 대답도 없이 윤호를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막 이십대 후반 쯤 되어 보이는 젊은 남자 서윤호는 더 신이 난 표정이었다. “이 녀석이 그 녀석이지? 형이 이태원의 가게를 박살내고 건져왔다는 그 녀석.” “……???” 박살냈다고? 그 때서야 지소는 뭔가에 얻어터진 듯 휙 고개 돌렸다. 그런 말은 정말 금시초문이다. 분명히 기영이나 이 남자는 자신에게 가게의 빚과 정당한 돈을 내고 사왔다라고 말했는데… “애들 풀고 불까지 질렀잖아.” 윤호는 점점 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지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지소는 잠시 움찔하며 넌지시 인후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서인후는 빨아들일 듯한 눈동자로 무심하게 동생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 포주 녀석, 완전히 넝마처럼 죽었다던데…” “……!!!” “설마 형은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 떼진 않겠지. 그 일 때문에 돈을 수억 썼다고 기영이가 말하더군.” 아아…. 지소는 들리지 않게 작게 탄식했다. 포주가 죽었다. 믿을 수 없다. 그럼 그 가게의 다른 놈들은? “왜 이 녀석을 빼왔지?” 윤호는 자신의 혼란과는 상관없는 듯 빙긋이 웃으며 형에게 물었다. 서인후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묘하게 미소지으며 다시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윤호라는 놈은 단단히 무시받은 표정으로 더 신랄하게 비꼬아댄다. “아버지에게는 일부러 그런 말 한 거 알아. 설마 이런 녀석하고 정말 같이 살 생각은 아니겠지?” “……” “형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녀석들과 섹스를 즐기잖아.” 다시 지소가 입을 벌리고 인상을 찡그리자, 그 때서야 큰 형이 냉랭하게 말을 끊었다. “그만해라, 서윤호.” “…하지만, 형!” “어차피 하룻밤 놀려고 샀겠지.” 정말 미친 집안 같았다. 지소는 허찬 웃음만을 지을 수 있었다. 이거 뭐하자는 건가, 지금…. 그 때였다. 하필 서윤호가 형의 그 말에 더 비틀린 표정으로 자신의 셔츠를 갑자기 북, 잡아당겼다. “하지만 인후형의 안목이라면 우리도 알아야지, 안 그래?” “……!!!” 자신의 몸 뒤에서 잡아당긴 그 험악한 손길에 갑자기 후두둑, 단추가 떨어졌다. 지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문득 재빨리 셔츠 깃이 벌어지고 어깨까지 쑥, 옷이 내려오는 순간에야 차가운 한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등 뒤에서 자신의 셔츠를 내리며 옷을 벗기던 남자가 느긋하게 말하는 소리도 들렸다. “이 녀석은 남창이야. 이미 아버지나 나나 인후형의 행각은 다 들어서 알고 있다고.” “……!!!” “우리한테 하사하러 데리고 왔을 거야, 그렇지? 아버지에게는 반항한다고 그렇게 굴었을 테지만…” 쓰윽, 갑자기 옷이 더 아래로 내려간다. 셔츠 자락이 열린 채, 거의 반라의 몸으로 이 기묘한 사람들의 식탁에 앉아 있는 것이다. 벗기든 말든 상관없었지만, 일순 자신에게로 쏠리는 14개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보자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서윤호가 즐겁다는 듯 중얼거리며 손을 미끄러뜨렸다. 냉랭하게 드러난 가슴으로 매끈한 손바닥이 문득 유두 쪽을 싸악 스쳐간다. “……!!!” 흠칫 놀라며 서인후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인후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런 동생과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술잔을 들며 아무런 인격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때, 서인후의 셋째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라고 했지.” 물론 소용없었다. 서윤호가 당치않다는 듯 자신의 목덜미를 더듬으며 아예 대 놓고 희롱하며 대답한 것이다. “왜?” “…어머니의 기일이야.” “흥, 웃기시네. 어머니는 무슨 어머니야. 모두가 그 여자가 죽길 바랬으면서.” “서윤호!!!” 둘째 형의 매몰찬 목소리에도 윤호는 멈추지 않았다. 시원한 가슴을 더듬는 손끝에 지소는 소름이 끼쳤다. 정말 범할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관객들은 여전히 유리알같은 눈빛으로 이 정도야 한두번도 아니라는 듯 저렇게 계속 쳐다볼지도 모른다!!! 게다가 서인후는 자신의 형제들처럼 표정없는 시선으로 그야말로 혼이 없는 차가운 시체같은 눈길로 그것을 서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윤호가 그런 자신의 생각에 쐐기를 박듯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형들도 궁금하잖아? 왜, 예전에 기억 안 나? 이 식탁 위에서 인후형의 그 여자를 모두가 맛봤…” 그리고 뚝. 뭔가 우당탕 소리가 났다. 지소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조금 전까지 등 뒤에서 자신을 노리개처럼 대하며 공개적으로 범할 태세인 그 녀석, 서윤호라는 놈의 얼굴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재빨리 자신이 쥐고 있는 포크와 서윤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충격받았다. 자신이 포크를 들고 순간적으로 일어나며 서윤호의 얼굴을 쓰윽 그어버린 것이다. “…씨발…” 본능적으로 욕이 나왔다. 이게 다 서인후 때문이다. 저 녀석이 오기 전에 안 그래도 한껏 고양시켰는데, 뭔가 속에서 부글부글 거리는 기분을 참지 못하고 그만 손님의 얼굴에… 아니… 이 사람은 내 손님이 아니다…. “꺼져.” 마침내 지소는 입을 열었다. 이 유령의 저택같은 곳에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것도 이 집안 황태자 중의 가장 막내 녀석에게. 그러자 검은 양복을 입은 이십대 후반의 남자는 조금씩 떨리는 자신의 손등과 반쯤 벗어서 나풀거리는 셔츠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내 자신의 저항을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곧 피식 웃는다. 남자의 말끔하고 잘생긴 얼굴에는 포크 자국이 남아 고양이 발톱에 생긴 상처처럼 세 줄로 피가 맺히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심장이 두근두근거린다. 이 사람은 내 손님이 아니다… 손님이 아니다… 나는… “죽여버릴 줄 알아.” 다시 포크를 쥔 손으로 목을 겨누며 차갑게 말했다. "다음에 시간이 남으면 내 똥구멍을 핥도록 허락해주지. 그 전에 손 대면 죽여버릴 줄 알아." 손끝을 가느다랗게 떨렸지만 목소리만은 냉정했다. 아마 표정도 그럴 것이다. 지소는 자신이 누구에게라도 이런 적이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없었다. 살다가 이런 손님을 만나면 재빨리 도망치고, 다시 붙잡혀 삭신이 부서지도록 얻어맞고… 그것이 전부였다. 이런 식으로 반항한 적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게 가능하다. 길고 오랜 시간 동안 익혀온 생존의 법칙을 마침내 풀어낼 수 있게 된다. 항상 놈들에게 이렇게 말해줄 순간을 꿈꾸었다... 머리 속으로 몇 번이나 이런 통쾌한 한 마디를 할 수 있기를 꿈꾸었다. 누구보다 직설적으로, 그리고 누구보다 차갑게... 지소는 관자놀이를 북처럼 쿵쿵 울려대는 현기증을 느낀다. 서윤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자신을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마른 입술을 축이듯 혀로 살짝 핥으며 교묘하게 웃었다. “서인후의 고양이군. 독기가 서서히 오르는…. 독기가 오른 고양이 요리는 마비된 신경에 좋지.” -이라고. 무슨 뜻인지 몰라 한참을 노려본다. 그러나 윤호는 피가 흐르는 뺨을 만지며 다시 비웃듯 중얼거린다. “저 고양이 한 마리 때문에 가게를 불태웠단 말이지…” 그 때서야 내내 무심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던 서인후가 조용히 일어섰다. 조용하고, 강하게,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 있던 동생을 완전히 무시하듯 쳐다보지도 않고… “가자.” 그것이 그가 긴 침묵 속에 꺼낸 말이었다. 아직도 어질 어질하고 한편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소리 때문에 다소 난감한 지소의 손을 갑자기 불쑥 잡는다. 문득, 뜨거운 열기가 손금을 타고 혈관에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시체의 눈처럼 냉혹하고 싸늘하던 조금 전과는 다른 체온이다. 이상한 기분에 그를 쳐다보자, 서인후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냉랭하게 형제들에게 말했다. “형제와 결혼하려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잘 봤겠지.” “……!!!” 도대체 아직도 뭐라는 건가, 이 인간이. “날 정신병원에 가두고 싶다면, 기꺼이 댁들을 결혼식에 초대하지.” “……”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선명한 한마디였다. 그대로 서인후는 발길을 돌렸고 지소 역시 그에게 손목을 잡혀 그곳에서 끌려나왔다. 정말 이상한 광경 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이다. 마술사의 마술 상자나, 혹은 요지경 속이나, 또는… 말로만 듣던 놀이동산의 귀신의 집처럼…. 그리고 길고 긴 계단과 복도를 거쳐 현관으로 나올 때 까지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꽉 잡힌 손목에는 지독한 독감처럼 꽤 높은 열이 전해질 뿐이었다. 이를 악 문 듯한 남자는 차에 올라타고 나서야 담배를 한 대 물었을 뿐이다. 지소는 자신이 무슨 큰 일을 벌였는지 조금 불안했다. 형제들의 말처럼 그가 가게를 태웠다면, 누군가를 없앴다면… 정말 왜 그랬는지도 묻지 못할 정도였다. 그만한 가치라도 있는 일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담배 연기를 화하게 한번 뱉으며 조용하게 말했다. “잘했다.” “……!!!” 이 남자는 정말 미친 건지도 모른다. 지소는 뭔가 더 듣고 싶었다. 하다못해 저곳에서 당한 취급만큼의 욕이라도 돌려줘야 할 것 같았다. 허나 끝내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문득, 남자의 탄탄한 손바닥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는 것이 이만큼 칭찬처럼 평온감을 주는지 전에는 몰랐다. 지소는 달싹이던 입술을 닫고 창밖으로 쓱 고개 돌렸다. 돌아가는 차 안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길고 지루한 정적이 다시 가득찼다. 5. Fighter 너무 멍하니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 멍하다기 보다는 생각이 좀 깊어졌다. 젓가락 끝으로 빈 접시에 그림을 그리는 지소를 향해 과외선생 성우민이 뒷통수를 따악 때렸다. “다 먹었으면 공부해, 새꺄!” 지소는 맞은 머리 부분을 더듬으며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맞다… 공부하고 있었지…. “이사님에 대해 더 아는 거 없어?” 턱을 괴고 묻자, 우민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을 펼친다. “별로 없어, 임마.” “가연이란 여자는 말 못 해?” “그런 거 어디서 들었냐?” “이사님 식구들이.” 그러자 시종일관 유쾌하게 과외 준비를 하던 녀석이 갑자기 책을 탁 덮는다. 매우 놀랍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사님 가족들을 만났단 말이야?” 지소는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던가? “대단하지, 그럼.” “……???” “그 집 식구들 모두 밥그릇에 달려드는 개 같은 성격들이거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 그렇게 됐지.” “…할아버지?” 그러고보니 어제 서인후도 그렇게 말한 것 같다. ‘할아버지의 재산이 아버지에게로 가지 않아서 모두가…’ 라고. 아마, 이 부자 형제들의 재산은 모두 할아버지의 손을 거쳐서 전해진 것 인 듯 보인다. “시간 돼?” 지소가 공부에 열중하지 않고 묻자, 성우민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은 두시간 전부터 계속 서재에 앉아서 창가를 쳐다보며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기초가 없는 지소로서는 우민의 친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노력해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우민을 향해 턱을 괴고 물었다. “나가자. 시간 되지?” 말끔한 교복을 입은 청년이 넥타이를 셔츠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는 연필 끝으로 책상을 두어번 두드리며 조용하게 되물었다. “어딜?” “가 봐야 할 때가 있어.” “…그러게 어딜?” “가보면 알아.” 으흠… 이라고 우민은 짧게 신음을 했다. 아마 서인후에게 연락을 하고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는 눈치였다. “아무 곳에나 나가도 된다고 했어.” 확신을 심어주듯 지소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음만 내키면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성우민의 눈썹이 곱지 않게 꿈틀거렸다. 지소는 그것에도 상관없이 보던 책을 덮고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게에 가봐야겠다. 아무래도, 그 서씨 일가의 미친 형제가 한 말이 진담이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다. *** 성우민은 자신이 왜 따라와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지소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첫째, 지리를 모른다. 둘째, 가게에 갔다가 혹시 아직 기도 놈들이나 포주 놈, 가게 주인이 있다면 바로 붙잡히니 연락책이 필요하다. 셋째, 가는 동안 정보를 더 모을 수 있다, 기타 등등. “서인후라는 인간 정신병원에 있었어?” 대놓고 묻자,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조금 뒤돌아본다. 우민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쉿” “……”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흥, 듣든지 말든지. “누가 그래? 도련님들이?” 우민이 곧 이마를 흐리며 물었다. 그는 가방에서 주섬 주섬 사과를 꺼내더니 또 내민다. 사과 소년이다, 사과소년. 지소도 아무 말 없이 그걸 받아들며 셔츠에 쓰윽 닦았다. 아삭, 한 입 물자 달콤하고도 신 느낌이 차르륵 입안에서 퍼졌다. “돌아가신 전 회장님, 이사님의 할아버지가 이사님을 아꼈지.” “……” “너도 봤을 거 아냐, 그 집 사람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야. 이사님도 정신병원에 끌려간 거 맞아.” “……” “열 여섯 살 때, 그리고 열 일곱 살 때.” “……!!!” 지소가 조금 놀란 눈빛을 띄자 우민이 어깨를 으쓱한다. “별로 안 겪어 본 일이 없다고 했잖아.” “…하지만…” “이사님에 대해 궁금해?” 삐리릭- 지하철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리자, 지소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궁금하지 않다. 궁금한 게 아니라, 왠지 마음에 좀 걸리는…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 “그 집 식구들 중에 이사님 좋아하는 사람 없어. 심지어 지금 회장님도 그래. 어쨌든 서씨 일가 사람이니까 거두신 거 뿐이지. 다른 형제분들도 문제가 많지만, 이사님의 경우는 어머니 쪽의 출신이 좋지 않거든.” “…출신?” 지소가 조용하게 묻자, 우민은 그의 이마를 소리나게 한대 딱, 때렸다. 은근한 통증에 눈꼬리가 절로 올라간다. 우민이 빙긋이 웃으며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이사님 어머니는 일본 화류계 출신이야.” “……!!!” “나도 들은 이야기야. 우리 어머니가 알고 계실 거야. 지금 회장님이 혼자 반해서 쫓아다니다가 그 분이 눈길도 안 주니까 억지로 응응응 해서 낳은 게 서인후 이사님이라고 하더군.” 갑자기 자신이 그에게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다. ‘당신이 내 태생을 알아?’- 라던 질문. 그리고 또한 떠오른다. 그가 얼마 전에 했던 말이. ‘그게 우리니까, 남창소년. 그게 우리 혈통이야.’ *** 지소는 유준의 그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정유준은 자신과 같이 가게에서 일하던 녀석이었다. 녀석은 자신보다 수완이 좋아서 가끔 돈을 잘 대주는 부자 놈들과 관계를 맺을 때도 많았다. 18살의 같은 나이에, 성격도 판이하게 달라서 그나마 그 무리에서 친한 놈 중 하나였다. 게다가 녀석 덕분에 뒷골목의 골방들을 지나 위치한 오토바이 수리점 녀석들과도 꽤 친하게 지냈었다. 그런 정유준이 거의 몇 년만에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았다. “살아 있었냐?” 지소는 눈을 깜박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가게에 가봤어.” 물론 여기 들르기 전에 가게에 먼저 갔었다. 아무래도 서윤호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리고 적어도 그 말이 거짓이 아님을 건 이주일 끝에 돌아온 골목의 끝에서 알아차렸다. 뭔가, 황폐하게 불에 그을린 흔적만이 남아 있는 골방들이 이상했다. “어떻게 된 거냐?” 지소와 유준의 주변으로 수리점 녀석들이 모여들었다. 유준은 맑은 얼굴에 검정 때를 묻히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죽은 놈이 살아서 돌아온 눈빛으로 쳐다본다. “어떻게 된 거냐니.” 그리고 오히려 반문했다. “가게에 불이 났잖아.” “…………” “기도 녀석들 다 도망가고, 주인 새끼 뒤지고, 다른 녀석들도 다 흩어졌어.” “…………” 지소는 갑자기 손바닥에 땀이 났다. 포주는 나쁜 새끼였다. 포주 뿐만 아니라, 대리 영업을 맡아주던 가게 주인놈도 질이 나빴고,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이곳에 잡혀온 열 두 살, 열 세 살 되는 놈들은 정확히 갈 곳도 따로 없었다. 지소는 식은땀이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천천히 문질렀다. 정말 불을 낸 거다, 그 미친 놈이……. “그나마 다행이었지.” 유준은 그 때서야 지소를 안심시키듯 밝게 종알거렸다. “그 새끼만 죽었으니 다행이지. 너도 도망가고 싶어했잖아, 계속.” “……불이 난 이유가 뭐냐?” 발목이 시큰거린다. 그 개새끼 포주 놈 때문에 일년에 몇 번이나 발목을 쇠사슬로 묶여서 지하방에 갇혀 있곤 했었다. 그 새끼는 최대 악질이어서, 말을 잘 듣는 녀석들에게는 선심을 자주 썼지만, 자신처럼 능력도 없고 쥐뿔도 안 되며 도망칠 궁리만 하는 놈에게는 얄짜 없었다. 걸핏하면 때리고, 밥도 안 주고, 벌거벗겨서 지하방에 묶어 놨다. 그러면서도 하루 일당을 벌어야 한다면 끊임없이 사내놈들을 불러다 몸을 혹사시켰다. 그런 새끼라면 죽어도 싸다. 이제 열한 살, 열두 살 어린 아이들이 뭘 안다고……. 그런데도 지소는 끊임없이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에 없는 날카로운 눈빛에 유준이 잠시 흠칫 입술을 깨물었다. “뭔지는 몰라.” “………” “경찰에서는 누전이라고 했는데……어차피 거기까지 조사도 안 해줘.” 누전이 아니라, 누전이라고 돈으로 매수했겠지. 머리가 지끈 지끈 아프다. 설마하니, 그 악질 포주 녀석이 돈만 준다면 자신을 안 팔았을 리가 없다. 자신은 고정 손님도 없었고, 손님들에게 착 안기거나 감기는 맛도 없었다. 유준이처럼 싹싹하거나 친절한 맛도 없고, 심하게 반항을 하거나 아니면 맥없는 인형처럼 자포자기로 굴거나…… 둘 중에 하나였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같은 놈을 빼오려 불을 지르다니…… 그게 오히려 돈을 주고 사오는 것보다 더 심했을 텐데……. “사실은 말이지……” 그 때 유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자신의 어깨 뒤에 서 있는 우민을 의식한 듯 녀석은 작게 소곤거렸다. “……나도 보진 못했는데, 희원이 녀석이 목격한 모양이더라구……” “………” “어떤 남자 셋이 들어왔는데…, 대장인 듯한 놈이 포주하고 몇 마디 했대. 희원이 녀석 말로는… 그 대장인 놈이 포주를 찌르는 걸 봤대.” “………!!!” “칼을 정말 잘 쓰는 놈이라고 하던데…? 그 새끼가 미친 놈처럼 포주를 패고 마지막에 그었대. 너 알잖냐. 포주 놈이 얼마나 악질이냐. 그런데 기도 놈들도 그 세놈한테 다 나가 떨어지고……” “………” “그 남자, 누군진 모르는데, 희원이 녀석말로는 정말 미친놈이었다고 하더군. 표정도 없이 사람을 그렇게 패는 놈은 처음 봤대.” 꿀꺽……. 갑자기 마른 침이 삼켜졌다. 점점 핏기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유준이 그런 자신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철없이 신난 듯 중얼거렸다. “희원이가 보기에는 포주 놈은 칼에 찔리기 전에도 이미 숨이 왔다갔다 했던 모양이더라구. 남자가 실컷 패고, 가게가 완전히 박살나니까, 다른 놈 둘이 가게 놈들을 도망가라고 말했대.” “……” “희원이도 그 때 똥줄 빠지게 튀었다고 하더군.” “…희원이 놈이 그 새끼 얼굴을 기억할까?” 그러자 유준이 해맑게 샐샐 웃었다. “기억한다 해도 두 번 보고 싶지 않을껄?” “……???” “그 날 밤에 희원이랑 만났었는데, 그 새끼, 욕실 슬러퍼 끌고 도망쳤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고 했어.” 하긴……. 그 잘생긴 녀석이 무표정하게 사람을 으깨고 불까지 질렀다면, 보고 싶지 않았겠지……. 이 바닥에서 못 볼 꼴 많이 봤지만, 매번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쉬자, 유준이 가볍게 등을 한번 때린다. “그런데, 넌 요새 어디 있냐?” “………” “다른 놈들 하고는 그래도 가끔 얼굴이라도 보기로 했는데, 넌 그 날 이후 안 보여서 말이야, 모두가 걱정했어.” “…걱정?” 자신이 아는 한, 그는 ‘가게’라고 불리는 그 한옥 집에서 가장 별 볼일 없는 놈이었다. 지소는 차갑게 웃으며 반문한다. 걱정이라니… 그런 걸 할 놈들이 아니다. “걱정했지, 쨔샤. 너 죽은 줄 알았다, 임마.” “…살아있잖아.” “어쨌든 그 날도 그 놈들 한테 많이 얻어 터져잖아. 불이 났는데 못 빠져 나오고 지하에 갇혀 있을까봐, 이 놈들하고 나하고 거기 몇 번이나 찾아갔다고.” 유준이 오토바이 수리점 녀석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소는 좀 난감해졌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곳을 나온 이후로 한번도 이 녀석들이 보고 싶거나 궁금한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뭔가 인간적인 결함이 큰 기분이었다. 예전으로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친구가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닌데…… “잘 대해줘?” 그러자 유준이 밝게 웃으며 넌지시 묻는다. 왠지 뭔가를 짐작하는 눈치였다. 지소는 이 역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알만 굴린다. 마침 그 때 전화벨이 울리지 않았다면 아마 어색한 침묵이 더 길어졌을 것이다. ‘어디야.’ 전화는 우민의 것이었다. 우민이 전화를 꺼내 받더니 어깨를 꿈틀거리며 자신에게 내민 것이다. 전화 올 사람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수화기를 쥐자마자, 저 쪽에서 싸가지 없는 말투가 금세 고막을 때렸다. “알아서 뭐하게.” 전화는 그 미친놈에게 온 것이다. 지소는 어깨와 귀 사이에 전화를 걸치며 조금 한가한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에 넉살좋은 우민이 유준과 인사를 나누는 눈치였다. 그것을 곁눈질로 보며 자신도 싸가지 없게 응답한다. “바쁘실텐데 웬 전화?” 표정없는 반문에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왠지 작게 웃는 기분이었다. 웃다니…… 그 남자는 그럴 만한 인간이 아니다. ‘가게에 있다며?’ 망할 성우민. 고새 고자질 하다니. 별로 숨겨야 할 일도 아니지만,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지소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조용하게 대답했다. “어딜 가든 무슨 상관이야.” 그러자 믿을 수 없게도 전화기 너머의 남자가 서늘하게 말했다. ‘데리러 가지.’ “………!!!” 두근. 심장이 내려앉는다. 당신이 여기 왜 와, 라고 목소리가 팍 잠긴 채 튀어나왔다. 그러자 유준이 의아한 듯 이 쪽을 쳐다보았다. 물론 눈치 빠른 성우민이 재빨리 그의 몸을 막으며 뭐라고 뭐라고 또 떠들기 시작했지만……. ‘잔말 말고 20분 정도 기다려. 데리러 갈 테니.’ 그러나 서인후는 더 이상 들을 말도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뚜-뚜-뚜- 이미 반박할 사이도 없이 수화기 너머에서는 단절음만 들려올 뿐이다. 그래, 마음대로 기르는 애완용이라 이 말이지……. 자기 하고 싶은대로만 다 하는…. 지소는 작게 신음하며 전화기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그것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켁!” 성우민과 다른 녀석들이 일제히 돌아본다. 우민이 단걸음에 다가와 바닥에 조각난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으!!! 이 개새끼!” 우민은 차가운 자신의 얼굴을 보며 별로 화를 내진 않았다. 대신 절규하듯이 울먹이며 오바했다. “비싼 거란 말이야, 새꺄!!!” “… 사달라 그래.” 당신한테 투자하는 그 미친 놈 있잖아. 지소의 싸늘한 답변에 우민은 울상을 지었다. 그 때서야 지소도 자신이 잘못했구나…… 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미안하다, 성우민. 넌 좋은 녀석인 것 같은데- 라고. *** 지소는 앞만 쏘아보았다. 성우민을 집에까지 태워다 주고, 이 위대한 이사님이 왜 자신을 데리러 왔는지 의아해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내심 불쾌했다. 뭔지는 몰라도 가슴 속에 핏덩이처럼 응어리 진 뭔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어.” 차는 조용하게 미끄러졌다. 선우기영이 차를 운전하다가 힐끔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도 알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직설적인 말에 서인후가 조금 고개 돌린다. 여전히 표정없고 서늘한 눈매였다. “당신 짓이지.” 그럼 달리 누가 그런 일을 하겠는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묻는 질문에, 인후는 나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가게 말이야. 불 낸 거, 포주 새끼 죽인 거, 다 당신 짓이지?” 깜박 깜박. 서인후가 눈꺼풀을 단조롭게 밀어올리며 물끄러미 쳐다본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는 눈길에 지소는 기가 막혀서 고개 돌렸다. 어차피 남자는 대답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분명,‘피식’ 공기 빠지듯 낮게 웃는 소리는 들린 것 같다. 문득 자신을 샀다는 이 남자가 어떤 인간인지 온 몸에서 소름이 바싹 끼쳤다. “그런 놈들은 감방에 살다 나와도 똑같다, 윤지소.” “…… “동정할 필요가 없어. 몇 개월인가 몇 년인가 살다 나와서 다시 너만한 열 둘, 열 한살짜리 아이들을 데려다가 골수까지 빼 먹으며 살 놈들이다.” “그래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어.” 마침내 지소는 고개를 휙 돌린 채 남자를 향해 말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부글 거리는 감정을 담아 말했다. 그러자 잘생긴 얼굴에서 눈썹이 한 쪽만 싹 올라간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지소는 그 얼굴을 노려보며 선명하게 덧붙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다. “당신이 그 사람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구.” “……” “내가 죽이고 싶었으니까.” 문득, 스스로 말을 뱉어놓고 질리는 기분이다. 지소는 순간 자신이 뭐라고 말했는지 깨닫고는 작게 신음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 때서야 더 짙게 웃었다. 눈가로 퍼져가는 검은 빛을 느끼며 지소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았다. 어디선가, 야릇한 피냄새가 나는 기분이다, 이 남자는. 욕망과 욕망이 부딪쳐서 소리를 내는 기분이었다. 그 때서야 남자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나쁜 피는 끓는 피지.’ 라던 말이. 어쩌면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 미친놈과 자신은 겉보기만 다를 뿐, 37.5도 보다 높은 체온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쁜 피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게 끓어오르며 관자놀이를 아프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 돌아오자마자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씻었다. 서인후와 식탁에 앉은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에 잘 먹히지도 않았다. 김여사는 계속 자신이 잘 먹지 않는다고 잔소리했지만, 지소는 형식적으로 몇 숟갈만 뜨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가게에 갔다 온 게 타격이 큰 것 같았다. 그는 대충 먹고 2층으로 향했다. 서인후와 기영은 서재에 들어가 자신들만의 비즈니스에 빠져 있는 모양이었다. 지소는 2층 거실 쇼파에 앉아 TV를 보기 시작했다. 최근에 와서는 이토록 한가한 저녁 시간이 자주 생겨났다. 그는 주로 서재에서 빼온 책을 읽거나(그래도 한글은 읽을 줄 아니까) 혹은 쌓여 있는 잡지나 신문도 읽었고, 또 가끔은 음악을 듣거나 TV도 보았다. 물론 제정신이었다면 그러다가 자신의 방으로 가서 조용히 잠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 일이 겹치고 피곤한 모양이었다. 원래 잠시만 앉아서 놀다가 잠들려고 했는데… ‘…아저씨가 밥을 줄 테니 따라가서 일을 할래?’ 갑자기 눈 앞에서 죽은 포주 녀석이 보였다. 이건 꿈이지… 라고 생각하며 지소는 불쾌한 느낌으로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나 두툼한 뱃살을 가지고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그 중년의 사내는 능글능글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계속 말했다. ‘멋진 형들도 가득 있고, 누나들도 있어. 이름이 뭐냐? 아저씨가 따뜻한 데서 재워주고 밥도 줄게…’ 빠져들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지소는 점점 더 눈앞의 환상이 강해졌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되었더라… 어두운 골목, 음습하고 퀘퀘한 겨울 냄새가 뭉쳐진 그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갔었다. 큰 철제 대문이 나오고, 오래된 한옥 같은 곳에서 낯선 신음들이 연달아 들려왔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묘한 욕설과 찰싹 찰싹, 살을 때리는 소리들도 짙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에게 빵을 주었다. ‘이 녀석인가?’ 정신없이 빵을 먹을 때, 눈이 벌건 어떤 중년의 남자가 들어섰다. 자신을 데리고 온 그 기름 진 포주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반갑게 말했었다. ‘안에다 싸는 대신 10만원.’ ‘비싼걸?’ ‘오늘 처음 들어온 놈이거든. 뒷탈도 없어.’ ‘비디오 촬영은?’ ‘그럼 촬영까지 해서 15만원. 관장은 안 돼. 잘못 찢으면 다음 장사가 안 돼.’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빵을 먹고, 지소는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아래에서 밀려들어오는 거대한 압박감에 몸이 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울음을 터뜨리며 울먹거리는 입 안에서 빵조각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벗겨진 몸이 부들 부들 벌려지며 퍽퍽거리는 소리가 계속 귓청을 장악했다. 누군가 자신의 뺨을 때리며 빵을 빼앗아갔다. ‘줘요, 줘요…’ 가느다란 신음과 울음에 주변에 몰려서 있던 장정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휘파람을 불며 야유하기 시작했다. ‘이봐 김씨, 달래, 어서 줘.’ 그 말에 아래쪽이 더 끈적거리며 달라붙었다. 팔을 마구 휘저으며 비명을 내질러도 보았다. 고개가 꺽일 듯 휘저어지고, 밝은 불빛 아래 남자의 몸이 고깃덩어리처럼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줘요, 줘…요…’ 그것은 쇼크였다. 정말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충격 때문에 온 쇼크였다. 지소는 단 한 마디 밖에 할 수 없었다. 줘요, 줘- 라고. 빼앗긴 빵을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자신을 범하던 녀석이 몸 안에서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이 녀석 죽이는데?’ 피와 범벅된 질퍽한 느낌에 저절로 허벅지에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높이 들려진 발목을 꽉 잡고 사내들은 다시 다리를 벌린다. 그대로 머리채를 끌어 일으키며 질질질 마당으로 끌어내렸다. 줄줄이 늘어선 방들의 문이 열리고, 흙투성이가 된 몸이 정액과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린 지소를 마당 계단에 개처럼 엎드리게 하고는 뒤에서 마구 박아대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그것은 새로운 스포츠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때 마구 소리 질렀었다. ‘더 해! 더!’ ‘이 녀석 죽인다. 야들 야들 한 게…쭉쭉 빨아당겨!!!’ 심지어 아래쪽에 대가리를 박고 구경하는 놈들도 있었다. 비디오를 찍던 놈이 자신의 얼굴부터 해서 그 짐승같은 행위를 곳곳에 담고 있었다. 자신이 비명을 더 내지르자, 누군가 그 입을 막듯 빵조각을 입속에 마구 짓이겨 넣었다. 낄낄거리는 소리가 더 심해지고, 뇌가 터질 듯이 아파서 눈앞이 까매진다. 남자의 성기가 덜렁거리며 다리 사이에서 부딪쳐 오자, 까마득한 아픔에 침이 흘러내렸다. 잔인하게도, 그들은 그걸 박수치며 구경했다. 박수소리가 거대한 기차의 소음처럼 뇌를 찢는 기분에 지소는 걷잡을 수 없이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 기영은 뭔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TV가 켜져 있는 거실을 지나다가 들린 소리였다. 이사와 간단한 스케줄 점검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그 소리에 그만 발길이 멈추었다. “……???” 의아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마침 걸어 나오던 서인후도 뭔가 들은 모양인지 눈썹을 움직였다. 서로 얼굴을 한번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기영은 이 젊은 이사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 그가 셔츠 소매를 걷을 때마다 보이는 무수한 상처들을 눈여겨보았고, 또 그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알고 있지만, 자신보다 몇 살이나 어린 이 젊은 청년은 늘 무서운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만큼은 자신이 모시던 이사가 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양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더니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곳을 향해 조용히 걸어갔다. 조심스럽게 따라가자 서인후는 쇼파의 앞쪽에 무릎을 한 쪽만 굽히며 천천히 앉고 있었다. “이사…님?” 자신이 다소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시는 이 이사는 굉장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 매력적인 외모 탓에 여사원들이 남몰래 설레인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다. 그러나 자신이 알기에 이 사람은 보통 굴곡 많은 인생이 아니다. 게다가 인간같지 않은 냉정함이나 철저한 광기도 곧잘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문득 눈을 가늘게 뜨며 쇼파 앞에 앉아 있었다.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작게 고개 흔들며 조용히 말했다. “돌아가.” “……!!!” 쇼파에는 윤지소가 자고 있었다. 녀석은 TV를 틀어놓은 채 깊게 잠들어 있었다. 뭔가 문제가 있는 모양으로, 잠든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떠오른다. 이 녀석을 처음 데리고 오던 날도 이 녀석의 목욕을 자신의 이사가 시켰었다. “……???” 이상한 일이다. 인간 서인후가 누군가에게 호의나 친절을 베풀 일은 없을텐데…. 그는 감정의 한 부분이 거세된 짐승같은 젊은이다. 그런데도 땀에 젖은 윤지소를 내려다보는 이사의 눈길은 상당히 복잡해보였다. 흔한 말로 뭔가 번잡한 사념이 담긴 시선이었다. “……!!!” 그리고 선우기영은 잠시 바짝 쫄았다. 이 젊고 미친 놈 밑에서 일한지 벌써 4년 정도가 되었건만, 그는 서인후가 한숨을 쉬는 걸 한번도 못 봤다. 그런데도 이 미친놈이 갑자기 쓴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리고는 더 놀랍게도… 그는 한손을 들어 미묘한 표정을 담은 채 잠든 남창 녀석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어올렸다. “이사님?” 그러보니 이상하다. 뜬금없이 주방 아주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윤지소가 어디 있는지 묻는 것도 이상하고, 그가 가게에 찾아갔던 말던 저녁 약속도 펑크내고 데리러 가는 것도 이상하고… 아니, 애시당초 왜 이 녀석을 선택했는지도 이상하고… “그 포주 놈이 팔지 않겠다고 했지.” 그 때 서인후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기영은 그 당시에 그와 같이 가게에 들어갔지만, 포주와 나눈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저, 왜 자신의 주인이 보통 때처럼 돈으로 해결하지 않고 갑자기 미쳐버렸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물론 그 전에 이 사람의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온갖 굳은 일을 다 겪었기에 망정이지…. “이 녀석의 발목과 손목엔 다 흠집만 있다.” 그러나 서인후는 뭔가 생각에 깊게 잠긴 듯 조용히 말했다. “목욕을 시키다 봤지.” “……” “포주가 나에게 말하길… 아무리 거액을 줘도 팔지 않겠다, 이 녀석을 길들이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는지 아느냐, 라고 하더군.” “……” “그 녀석을 죽인 게 나쁜 거라고?” 그리고 쿵- 선우기영은 얼어버렸다. 서인후가 갑자기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는 무슨 악몽이라도 꾸는 듯 끙끙거리는 윤지소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 믿을 수 없다… 저 짐승이 정말 단단히 미쳤다… 끄응- 이라고 더 작게 신음하며 지소가 돌아누웠다. 그러자 서인후는 상체를 크게 들썩이며 나른하게 한숨쉬었다. 그는 기영이 더 믿기 힘들 정도로 진지한 시선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조금 떼어주자, 조금 붉어진 갸름한 얼굴이 들어났다. 잠든 지소는 좀 더 어려보였다. 감고 있는 눈꺼풀에서 긴 속눈썹이 조금 떨리며 가늘게 신음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잠이 든 것이 짜증스러운 듯 조금 찌푸린 얼굴이었다. 미색이다. 윤지소는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똑같은 사내인 선우기영은 잘 알고 있었다. 지소는 아름답다. 아무렇게나 차려입고, 아무에게나 다리를 벌리며 살아온 녀석이지만, 외모적인 아름다움과는 또 다른…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침착하게 뭔가 쏘아볼 때는 이따금 그가 정말 천박한 남창 윤지소가 맞는지 궁금할 때도 있었다. 게다가 잠결에 뭐라고 뭐라고 입을 열며 인후의 셔츠 깃을 확 잡아당겼다. 아마 그게 서인후라는 걸 모르고 한 행동 같았다. 그 쯤 되자 기영은 저절로 머리를 머쓱하게 긁고 말았다. 자신의 주인도 어쩌면 알지 모른다. 어쩌면 이 인간이 없는 상관도 조금은 마음이라는 걸 찾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윤지소가 자신에게 점점 더 싸가지 없게 대해도 봐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영은 그들의 조용한 모습에 놀랍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침 그 때, 번쩍, 군대 생활로 단단해진 팔로 잠든 녀석을 안아 올리며 서인후가 조금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그 포주라는 녀석… 일부러 이 녀석에게 최고 저질인 놈들만 붙였던 모양이다. 몇 년동안.” “……” “그걸 알고 눈이 뒤집혔지.” 갑자기 기영은 뭔가 머리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뼈대가 있는 청년이라 나름대로 무거울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번쩍 안아들며, 서인후는 발길을 돌렸다.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겁니까?” 기영은 무심결에 물었다. 그러자 방으로 걸어가던 단단한 등이 잠시 멈추었다. “아니.” 주인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자네가 알아봐야 할 뭔가가 있는 거지.” “……”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오랜 시간 인간임을 거부하듯 처절했던 남자가 처음으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기영은 자신이 윤지소에 대해서 더 알아봐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자신의 상관이 믿기지 않게 온화한 태도로 잠든 녀석을 조용히 앉고 들어가는 것에 기가 막혔다. 기영은 그가 사라지고도 한참 동안이나 못 박힌 듯 그곳에 서 있었다. 6. Fighter 잠든 녀석이 몇 번이나 뒤척였다. 자다가 좀 성질이 나는 듯, 이맛살도 잠깐씩 찌푸렸다. 새근 새근, 잠든 숨결이 편안해지자 그것도 퍽 좋게 느껴진다. 서인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뭐라고 뭐라고 종알거리는 게 듣고 싶었다. “…개새끼” 잠든 윤지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게 전부였다. 인후는 피식 건조하게 웃었다. 시선을 좀 더 가까이 하자, 녀석의 벌어진 셔츠 깃 안으로 군데 군데 화상의 자국이 보인다. 매끄러운 피부였는데, 그 차가움을 모독하듯 여러 개 나있는 담배빵 자국에 저절로 인상이 굳어졌다. ‘뭐라고 해도 안 팔아, 가쇼.’ - 라고, 죽은 포주 녀석이 말했다. ‘저 녀석은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녀석이지. 데리고 갔다가 만신창이가 되면 나만 곤란하니까 그냥 가쇼.’ 살이 찐 포주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말했다. 그러나 서인후는 오랜 경험상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말없이 노려보자 늙은 돼지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큰 걸로 열장을 준다면 생각해보지.’ ‘……’ ‘저 녀석이 벌어들인 돈이 얼만데 말이야… 크크… 그 동안 온갖 변태 놈들은 다 처리반이었거든. 오물 처리반이야, 오물 처리반…. 저 녀석 있으면 얼마나 편한데…크크크… 알아서 도망가주지, 알아서 반항해주지, 매일 강간하는 기분이라니까…’ 그 말에 이성을 잃었다. 서인후는 짧게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서 잠든 녀석을 바라보며 이게 뭐하는 짓인가. 그것도 15살은 어린 녀석에게. “…싫다고…” 그 때였다. 갑자기 녀석이 몸을 비틀었다. 일어나려던 몸이 불쑥 앞으로 당겨진다. 아주 잠깐 사이에 잠든 윤지소가 자신의 옷깃을 확 잡아당긴 것이다. “……?” 인후는 갑자기 긴장이 들어서 고개를 숙였다. 땀에 젖은 하얀 얼굴에 점점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 뭔가 더 말할 듯 입술을 달싹이는 그 얼굴에 집중하고 말았다. 1초, 2초, 3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인후는 그가 꽉 쥐고 있는 자신의 셔츠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침착하게 그것을 풀어주려 애쓴다. 그러나 잠결에도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쥔 녀석은,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달라는 건가. 생판 처음 겪는 묘한 조바심에 인후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잡고 있으면 어디 딴 데 가서 잠도 못 잔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깨우려니 그것도 좀 그렇다. 일단은, 이 집에 온 이후로 늘 경계심이 강한 눈초리로 쏘아보던 녀석이 모처럼 편안한 얼굴이었다. 경계심이 강하다는 건 겁을 먹었다는 것이다. 고양이들은 원래 겁을 먹으면 ‘하악’거리며 꼬리를 세우니까. 그런 긴장감이 조금 빠진 얼굴은 더 어려보이고 한결 편해보였다. 악몽 탓에 조금은 젖어 있었지만, 뭐, 상관없었다. 달끈한 숨소리가 새근거리며 입술 가에 머물렀다. 참 예쁜 입술이다…. 살짝 벌어진 채 가는 숨을 내쉬는 입술은 아기처럼 포근해보여서 미묘하게 이질적이고 한편으로 매력 있었다. 별로 다른 생각은 없었지만, 얼굴만큼은 분명 그 인간의 취향이라서 골랐는데…. 인후는 반쯤 포기하는 기색으로 침대 가에 앉아 손을 올렸다. 노란 스탠드 불빛에 잠긴 얼굴이 상당히 은밀해 보였다. ‘얼굴도 별로고, 키도 커져서 이젠 쓸모도 없어. 그래도 이건 비밀이지만, 그 녀석이 우리 가게의 수완이지. 그 정도 뽑아야 본전이 되지. 그 녀석 고정 손님들도 많은데 하루에 몇 번은 싸주게 만들어야 한 몫 챙긴다고.’ 포주 녀석의 말이 다시 들려오는 기분이다. 그 때도 불이 붙은 집을 등지고 녀석을 안고 걸어 나왔다. 기절한 녀석의 몸이 단단한 뼈에도 불구하고 부서질만큼 포기가 어려 있어서 와락 짜증이 났었다. 내가 구해주지, 그러니 포기하지 마라…. 인후는 서늘한 눈동자로 잠든 얼굴을 지켜보다가 그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불쑥, 본능적으로 손바닥으로 잠든 입술을 덮어보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기분이 든다. 왠지 그것이 동정심을 불러일으킨 탓에 인후는 쓰게 한숨을 쉬며 얼른 손을 걷었다. 아까는 악몽을 꾸고, 이번에는 마음이 아픈 꿈을 꾸는 모양이다. “…싫다구…” 라고 중얼거리며 녀석의 조금 붉어진 눈꼬리에 말간 눈물이 비추었다. 인후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눈물기를 보고 있었다. 또르륵… 맑게 떨어지는 눈물을 보니 어딘가 더 마음이 갑갑해진다. 불쑥, 그는 그 소금기를 따라 혀를 조금 핥아보았다. 눈물이다. 참 예쁘다…. “…하지 마…” 그러다 잠꼬대가 귀찮은 듯 더 늘어났다. “좀 있다 해… 강주원…” “……!!!” 천천히… 서인후는 막 파묻으려던 서늘한 목덜미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이 녀석을 어떻게 하려던 생각도 없었고, 찌푸린 인상이 좀 불쌍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순간 그는 딱딱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강주원이라… 좀 있다 뭘 하란 말이지…? 그는 한참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하게 머리를 쓸어올렸다. 잠든 녀석은 이제 꿈도 안 꾸는 것처럼 곤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 어귀에서 고르게 오르락 거리는 호흡을 느끼며 인후는 일어섰다. 그 때서야 사르륵, 자신의 셔츠를 꽉 쥐고 있던 긴 손가락이 풀려나갔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갑자기 입술을 살짝 굳히며 휙 등을 돌려 걸어 나간다. *** “강주원은 평범한 고등학생 입니다.” 선우기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후는 서류에 재빨리 싸인을 하고 만년필의 뚜껑을 닫았다. 그것을 귀찮은 듯 고급 마호가니 책상 위로 던지자, 기영이 낮게 헛기침을 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 “강주원이라는 놈은 지소가 있었던 고아원의 옆집에 살던 놈이었습니다. 바르고 견실하고, 착한 녀석으로 소문나 있습니다.” “……” “현재는 녀석이 다니는 K고등학교 학생회 부회장이고…” 그러다 기영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상사의 싸늘하고 무심한 얼굴을 보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처해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인후가 아무 말도 없이 앞쪽만 쳐다보자 한숨을 쉬며 갑갑한 듯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이내 체념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준비한 종이를 읽어나갔다. “지소랑 친했습니다.” “……” “지소가 자퇴한 초등학교 때까지 거의 유일 무이한 친구입니다.” “……” “지소군이 유곽에 팔려갔을 때는 두어 번 찾아오기 까지 했습니다.” “……” “다른 녀석들의 말에 따르면… 찾아왔지만, 지소군이 모른 척 하는 바람에 한번은 돌아갔다고 하더군요.” 기영이 준비한 것을 읽어나가며 조심스럽게 눈치를 봤지만, 인후는 끝내 아무 표정도 없었다. 다만, 약간의 틈을 두고 마치 뭔가를 비웃듯 조용히 말했다. “한번은 돌아갔다고?” “……” “그럼 두 번째는 그냥 안 돌아갔단 말이군.” 그때서야 상관은 자신을 쳐다보았다. 흠칫, 그 서늘한 눈초리에 기영은 잠시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씨발, 또 보인다, 저 눈동자. “이사님…” “윤지소에 대해서는 알아봤나?” 허나 서인후는 시선만 미묘하게 변했을 뿐, 이내 정색을 하고 물어왔다. 기영은 더욱 답답해져 오는 가슴 덕에 작게 한숨을 쉬며 조용히 대답했다. “알아보고 있는데…” “……” “수녀님들도 정확히 말씀을 안 해주시는…” “……” “차라리 조폭이나 이 쪽이면 어떻게든 설득을 하겠는데… 수녀님들은… 아시다시피 저희도 어떻게 하기 힘든…” 인후는 거기까지만 들을 생각인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한번 저었다. 기영은 어쩐지 안도감이 밀려오며 재빨리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다가 아침에 보고받은 또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것 역시 전해봤자 좋은 소식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사님…” 기영은 애써 인내심을 발휘하며 입구에서 그를 불렀다. 서인후가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그래도 어쨌든 연락들을 전달하는 게 자신의 임무이므로 기영은 한숨을 푹푹 쉬며 입을 열었다. “형님이 전화 하셨습니다.” “……” “서정후 전 이사님이요.” 휴… 정말 미친 놈이다, 자신의 이사는….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몰라서 늘 전전긍긍이다. 특히나 그의 아킬레스 건을 건드리면 더욱 그렇다. 이전에는 가연이 아가씨가 그래도 많이 막아주었지만, 이제는… “미끼를 물었군.” 이제는 그렇지 않다. 가연이 아가씨가 이젠 아무리 애를 써도, 서인후는 서정후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안가연 아가씨 그녀 조차도. 한 때 안가연은 서인후의 모든 것이었는데…. “가연이의 병은 깊어지고…” 미친 남자 서인후가 중얼거렸다. “내가 형의 모든 지분을 빼돌렸으니 결국 연락이 오게 되어 있지.” “……” “대 재벌가의 딸과 아들들인데, 두 눈 뜨고 죽어가길 원하진 않을 테니까.” 선우기영은 가끔 이런 일에 소름이 끼쳤다. 서인후는 일부러 서정후의 모든 재산을 가로챘다. 그렇게 해야 모든 연락을 끊은 채 도망간 두 사람이 제 발로 찾아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나 가연 아가씨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집안에서 냉대받고 어디에서도 사랑받지 못한 가연 아가씨에게 오로지 관대했던 게 바로 서인후 였다. 또한 자신의 주인은 매우 악랄하고 잔인해서, 절대 한번 배신당한 것에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아무도 모르게 약혼식 다음 날 자신의 형과 도망간 약혼녀를 용서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다. 가연 아가씨를 죽이고 싶진 않더라도, 그에 상응하는 복수를 이제 시작할 것이다. “이사님…” 그러나 기영은 그가 이 쯤에 그만 포기하길 원했다. 그렇다 해도 늘 자신의 주인은 모든 상황을 비참할 정도로 파괴했지만. “또 연락이 오겠지.” “……” “기다리자구.” 역시나 정글을 파괴하는 표범이 한 날카로운 말은 그게 전부였다. *** “몇 주간 더 공부해 보고 입학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지.” 그의 퇴근시간이라는 걸 깜박 잊었다. 하긴 서인후가 제 때에 퇴근한 일이 거의 없으니, 최근 따라 일찍 들어오는 기색에 김여사님도 자주 당황하는 터였다. 1층의 또 다른 서재라 불리는 곳에 앉아 책 더미에 파묻혀 있던 지소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학교?” 고개를 들자마자 단정한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넥타이에 매듭을 살짝 풀며 서인후는 단조롭게 말했다. “학교.” 갑자기 적응하기 어려운 단어가 나와서 당황스럽다. 지소는 얼굴을 문지르며 천천히 일어섰다. “계속 더 공부해.” “……” “김여사님이 식사 준비 다 되면 부르신다고 했으니.” 그러나 그의 말 같은 건 잘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라니… 12살 이후에 나온 그곳에 다시 들어갈 수 있을까. 제대로 다닐 수는 있나? 친구들은? 선생들은 멸시하지 않을까? “저기…” 남자는 표정없이 다가와 자신이 들여다보던 책장을 휙휙 넘기기 시작했다. 지소는 전에 없이 난처해져서 중얼거려야 했다. “나 같은 놈을 받아주는 학교가 있을까.” 의심스런 눈초리에도 인후는 싸늘하게 대답한다. “너를 받아줘야 학교지.” “…하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그가 가진 권력이나 힘을 이용해서 서류를 위장하고 어떻게 생색을 낸다고 해도, 하다못해 다른 녀석들과 축구라도 하기 위해 체육복만 갈아입어도 몸에서 벌써 표가 난다. 그러나 서인후는 얼굴을 돌리며 자신의 걱정을 비웃듯 살짝 조소 지었다. “강주원이 보고 싶지 않아?” “……!!!” 그만 혀가 빳빳하게 굳는다. 강주원이라…. 너무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라서 그렇다. 지소는 그 이름이 왜 여기서 튀어나오는지 이해가 안 됐다. 어린 시절에 친했던 녀석인데…, 고아원을 뛰쳐나온 이후로 늘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내려앉게 만들던 녀석인데… “주원이라는 놈하고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해 주지.” “……!!!” “이름 강주원, 나이 열여덟, 알아보니 네가 다니던 고아원의 옆집 친구였더군. 둘이 친했던 모양이야.” “……” “네가 여기저기 팔려 다니는 동안에도 강주원이 두 번 정도는 너를 찾아왔었지.” 어떻게, 왜,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고 주원이 녀석과 눈물겹도록 뭔 사연이 있고 그런 것도 아닌데…. 평범한 집안의 썩 괜찮은 친구 강주원이었을 뿐인데…. “나랑 상관없는 놈이야.” 지소는 일부러 정색을 하고 말했다. 주원이 어린 마음에 두 번 정도 가게를 찾아왔을 때도 그는 끝까지 주원을 모른 척 했었다. 그게 맞다고 여겼었다. 그 때도 주인에게 똑같은 말을 했었다. ‘모르는 놈이야.’-라고. 그렇지 않으면 착한 녀석 강주원이 어떤 일을 당할지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주원을 본 것은 거의 4년 전의 일로, 어차피 두 사람은 살아가는 세계가 크게 달라서 거의 기억도 나지 않는 얼굴이다. 지소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유도 모르게 긴장이 느껴져서 그는 다소 쿵쾅 거리는 심장을 잠재우며 말해야 했다. “친하지도 않았던 놈이야.” “……” “게다가 서로 살아온 세계도 다르고.” 그 말에 서인후는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 시선이 표정 하나 없이 얼음 같아서 왠지 더 긴장이 된다. 초조한 자신의 심경과는 상관없이 날카롭게 쏘아보던 시선이었다. 가늘어지는 눈매와 짙은 눈썹이 그 서늘한 얼굴과 잘 어울린다. 자신을 기르는 남자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하고, 숨겨야 할 만큼 중요한 녀석이었군.” “……” “그렇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친구나 우정, 의리같은 걸 고민해야 하는 보편적인 삶들과 달랐다. 지소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노려만 보았다. 그러자 남자가 살짝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같이 잤나?” 그 말에 번쩍, 지소는 눈꺼풀 아래에서 불꽃이 일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이 놈은…. 모두가 저 같을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강주원은 같이 자고 말고 할 사이도 아니었다. 그 놈 혼자 좋아서 쫓아오고, 친구라고 거들먹거리며 가게까지 따라온 끈질긴 놈이었을 뿐. 그 놈을 무시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러나 그 조롱이 어린 눈동자를 보니 기가 막혔다. 아무리 봐주는 기색이 들어도 주인은 주인이고, 손님은 손님이다. 서인후라는 인간의 한계다. 지소는 바락바락 오기가 올랐다. 기분 나쁘다. 최상의 거액으로 사들인 손님이라는 거 뻔히 아는데, 꼭 모든 일을 매사에 그렇게 몰고가다니…. 언제나 그것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다. “남창이 손님이랑 자는 건 당연한 거지.” 지소는 차갑게 굳어가는 심장 아래 쪽을 느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 서걱거리는 침묵 속에서 서인후가 피식 웃는다. “손님?” 반문하는 게 더 웃겨서 지소는 메마른 미소를 지었다. 학교는 무슨… 학교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다. 어차피 변태같은 욕구나 해결하려고 사들인 거면서…. 자기 마음대로 사람도 죽이고…. “당연히 손님이지.” “……” “돈만 내면 다리 벌리는 게 당연한 거야.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거잖아. 돈을 많이 내면 그만큼 더 박을 수 있지.” 삐뚤어진 자신의 대답에 그의 눈썹이 잠깐 꿈틀거린다. 지소는 아주 잠깐 쾌재를 불렀다. 아주 잠깐. 그가… “이리 와.” -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 말에는 다정함이나 성적인 기분 같은 게 전혀 없었지만, 문득 몸이 바싹 얼어붙는다. 이 곳에 온 첫날 밤을 빼고는 건 삼 주가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저 사내가 저렇게 말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의 음성은 자기 집 개를 부를 때보다 더 인간미가 없었다. 그러나 거부하기 힘든 명령이었기 때문에 지소는 입술 끝을 표 나지 않게 살짝 깨물며 다가섰다. 경계심 강한 발걸음에, 남자가 답답한 듯 팔을 휙 내민다. “기어 오르는 건 얼마든지 환영이지만…” “……” “나를 화나게 하진 마라.”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를 화나게 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한 서인후의 눈동자나 표정에 화난 기색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그저 꽉 잡힌 팔꿈치가 아파서 살짝 찌푸린 듯 노려보았다. 서인후가 그 모습에 무심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경고하지.” “……” “내가 화가 나면 어떤 일을 벌일지 나도 잘 몰라.” 바로 코앞에서 눈동자가 열려져 있다. 검은 시선, 칠흑같은 눈동자에서는 왠지 향이 날 것 같았다. 지소는 마른 입술을 한껏 축이며 그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무슨 말인지 몰라 노려보는 시선으로 눈꺼풀을 깜박거리자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를 반쯤 벗겼다. 훅, 하고 복부가 단단해진다. 지소는 자신이 아무리 이곳에서 편하게 지내고 그가 자신에게 많은 것을 보장해 준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손님과 남창이라는 관계는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잊혀질 때쯤 되면 번번이 튀어나올 만한 관계들이다. 지금도 역시 그랬다. 그는 여느 손님들과 달라서 번들거리는 눈길이나 흉물스러운 욕정을 드러내고 신호를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신경하게 자신이 입고 있던 셔츠를 아래로 강하게 잡아당긴다. 부욱- 하고 찢어질 정도로 당겨진 셔츠 아래로 매끈한 상체와 쇄골이 드러났다. 최근에는 좀 더 근육이 붙어서 이제 꽤 인간다운 몸이 되고 있었다. 지소는 갑자기 예고도 없이 자신의 옷을 벗기고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당혹하고 말았다. 뭔가 작은 신호라도 있었으면 각오라도 했을 터인데…. 가슴 어귀에 불어오는 싸늘한 공기와 부딪치고 미끄러지는 시선을 의식하자 저절로 입술을 깨물어진다. 그는 애써 목 너머에서 간질거리는 난처함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 “당신이 주인이라는 거 잊지 않아. 그것도 최상의 고객 중에 하나지.” 설령 내가 예전보다 더 강해지고 있다고 해도 그 역시 당신이 그렇게 하길 명령했기 때문이지. 당신은 그런 인형을 만들기 위해 나를 샀고…. “…난 바보가 아니야. 손님을 화나게 만들지 않아.” 지소는 그의 눈으로 시선을 맞추며 힘껏 말했다. 일부러 당당하게 보이기 위해 살며시 조소도 띈채 꺼낸 말이었다. 그러자 팔짱을 낀 남자는 피식 웃는다. 점점 더 눈동자가 싸늘해지고 있었다. 지소는 그가 또 어떤 이상한 짓을 시킬지 몰라 속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미 화나게 만들고 있다, 윤지소.” 서인후는 하얀 셔츠 위로 단단히 팔짱을 끼며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턱을 쳐들자 그는 입꼬리만 올려 묘한 미소를 지었다. “……!!!” 그리고 갑자기 휙,…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아직 한번도 서인후의 벗은 몸을 본 적이 없고, 그가 자신을 안은 적도 없기 때문에 지소는 정말 단단히 굳고 말았다. 설마, 이런 자리에서? 그것도 예고도 없이…? 아무런 신호나 아무런… 아니, 아주 말초적인 성욕도 없이…?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변태들은 바로 싸늘한 눈동자로 도발을 명령하는 놈들이었다. 자신을 벌거벗겨놓고 전라의 몸을 마음껏 눈과 입으로 희롱하면서, 막상 견딜 수 없을 때가 오면 스스로 사내의 것을 도발하도록 파괴하는 자들이었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길들임과 다름없었다. 언제나 그 때가 오면 마음과는 상관없이 육체적인 욕정에 좌절하며 자신은 흐느끼거나 허리를 떨어야 했다. 그런데 늘 이 남자가 그런 것이다. 지소는 그가 자신에게 첫 번째로 한 테스틍 외에, 이번에는 어떤 경고를 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화나게 만들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지.” 그러나 서인후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넥타이와 셔츠를 휙 벗으며 말했다. 자신의 동요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펄럭거리며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옷들만이 자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쿵- 그가 옷을 벗자마자 자신의 몸으로 손을 뻗었다. 흠칫, 하고 어깨가 굳을 정도로 단단한 손끝이다. 허나 막상 몸이 완전히 얼어붙은 것은 그 손가락 끝이 천천히 상처들에 닿기 시작했을 때였다. 살짝 내려 깐 눈썹이 숨 막힐 만큼 고혹적이었다. 언제나 울퉁불퉁한 녀석들만 상대해 온 지소는 그 순간의 당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알지 막막했다. 같은 남자지만 단단하게 박힌 근육들과 그곳에 무수하게 나 있는 상처들은 차라리 시선을 빼앗기게 만들었다. “……!!!” 문득 무릎이 휘청 꺾일 정도였다. 서인후가 갑자기 자신의 몸 가까이로 고개를 숙이며 목덜미부터 천천히 입술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지소는 손가락 끝까지 저릿하게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있어.”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몸 위 상처들을 입술로 빨아들일 듯 세게 누르며 중얼거렸다. 허리를 잡힌 채 도망가지도 못하게 곳곳을 간지럼 태우듯 스쳐 지난다. 때로 어떤 유연한 피부에는 일부러 이빨을 세워 깨물 듯 키스했다. 츄읍, 하고 입술 점막이 달라붙는 소리에 지소는 점점 더 허리가 부들 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잠…” 기어이 청바지 버클이 풀리는 소리에 당황하며 입을 열었지만 소용없었다. 서인후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벗기며 혀를 점점 아래쪽으로 미끄러뜨린다. 가슴 어귀와 목덜미가 긴 시간의 입맞춤들로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이상하게 복부 아래가 간지러워졌다. 간질 간질한 감각은 그가 드러낸 허벅지 사이로도 기어올라왔다. 한번도 손님에게 봉사 받은 적이 없는 지소는 어쩔 줄 모르며 손아귀만 쥐었다 피었다를 반복했다. 그가 입술을 더 깊숙이 파묻으며 더 자라기 시작한 까슬한 음모 속을 혀로 더듬을 때는 꽉 막힌 신음이 목 안에서 겨우 잠겼다. “…으응…” 아무리 가만히 있으라고 말해도, 이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허리가 움직인다.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서인후가 유달리 다정하게 하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히 이전의 놈들이나 이전 행동들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다. “다리를 벌리고 조금만 구부려.” 그 때 남자가 말했다. 지소는 덜덜거리며 떨려오는 허벅지에 힘을 꽉 주고 양 쪽으로 벌렸다. 그리고 서 있는 자세로 양쪽 무릎만 마치 벌을 서듯 살짝 구부린다. “손을 아래로 내려서 더 벌려. 그래야 이 쪽에서 속이 제대로 보이지.” 이미 자신의 것은 발기하기 시작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지소는 환한 조명 아래에서 또 다시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간신히 경련이 일어나는 다리로 버티며 양손을 아래로 내려 엉덩이 사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앉아 있는 남자의 시선이 바로 속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너무 오랜 시간 방치했나?” 음부 사이에서 남자가 웃듯이 말했다. 입김이 예민한 곳에 확 와 닿자 지소는 입술을 깨물며 작게 신음하고 말았다. 그것을 즐기듯 서인후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입 안에서 휘젓더니 그대로 그것을 꺼내어 지소의 몸안에 쑥 하고 집어넣는다. “…아읏…” 저절로 목이 꺾인다. 복부 아래가 더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원하는 곳에 닿지 않는 그 손가락이 안에서 꿈틀거리자 더욱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렸다. “허리를 더 아래로 내려. 혼자 손가락을 끝까지 박아.” 남자는 손가락을 네 개쯤 세우며 말했다. 지소는 비참할 정도로 엉덩이 사이를 손으로 벌리고 남자가 다리 사이에 세운 손가락을 찾아 입구부터 천천히 몸 안에 삽입하기 시작했다. 미끌거리는 그것이 내부의 점막을 누르며 파고들었다. 그 때마다 이빨 사이에서는 묘한 소리가 욱하고 튀어나온다. “좋아… 그대로.” 남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지소는 그 손가락을 몸 안에 넣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벌을 받는 사람처럼 힘든 자세로 서서 그의 손가락을 사내의 성기인 냥 품고 아래 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입에서는 그가 원하는 천박한 신음들이 흘러나온다. “…아…응…” 허리를 아래로 내리면 절정의 부분에 닿을 듯 스쳤다가 다시 움직이면 입구 끝 쪽까지 밀려나간다. 남자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지소는 발기한 자신의 것에서 흘러내린 정액으로 사타구니가 축축해질 때까지 움직이고 말았다. 불이 켜진 서재의 밖으로는 넓은 정원의 큰 개들이 모여들었다. 그 말 못하는 짐승들에게 보여지는 기분이 수치심을 더욱 자극한다. 게다가 유리창에는 밝은 불빛 탓에 자신의 자세와 행위가 노골적으로 비추고 있었다. “…그…만…” 가느다란 신음에 갑자기 뚝, 끊어졌다. 그가 손가락을 갑자기 빼내며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첫 번째 테스트와 마찬가지로 지소는 몸 전체가 부들거리며 울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언제나 견딜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지만 끝을 보여주진 않는다. “……!!!” 조금은 멍한 눈길로 찌푸리며 노려보자, 서인후가 갑자기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쿵, 겨우 버티던 무릎에 힘이 풀리며 지소는 엎드린 자세를 하고 말았다. 그대로 질질질, 마치 끌려가듯 비참하게 창문 바로 앞에까지 그는 겨우 기어서 갈 것을 강요당한다. “…씨발…!!!” 이런 식은 싫었다. 그러나 저항할 수도 없었다. 기껏해야 허락받은 욕설만 강하게 튀어나올 뿐이다. 드르륵, 엎드린 자신의 코앞에서 창문이 열렸다. 정원의 맑은 풀 냄새가 방 안의 물씬한 땀 냄새와 섞여 들어온다. 지소는 단단하게 얼고 말았다. 주인을 알아보고 몰려든 큰 개 서 너 마리가 눈 앞에서 얌전하게 몸을 웅크리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대로 있어.” 그러나 자신 역시 그 개들의 자세와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네발로 엎드린 듯한 자신의 몸을 두드려 엉덩이만 높게 쳐들게 만든다. 손가락으로 조금 전까지 실컷 괴롭힌 그곳이 공기 중에 활짝 열렸다. 자신이 알지 못한 시선이 어떤 식으로 몸 안을 들여다보는지 짐작이 가고 만다. 지소는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만해…제발…”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도 백번 정도 사과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는 이미 개들이 정액 냄새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고 있다. 맑은 눈동자가 몇 개나 자신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쑤욱, 젖은 그곳을 뚫고 굵고 단단한 것이 들어온다. “…흑…” 자신이 정말 개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주인의 말을 듣기 위해 모여든 녀석들 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엎드린 채 뒤에서 뚫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이 수치스러웠다. 그러나 사내는 앞쪽에서 덜렁거리는 자신의 것을 손으로 꽉 쥐며 강하게 허리를 밀어올린다. “…아윽!!!”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개들이 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관찰한다. 그 때 한번 빠져 나간 뜨거운 남근이 다시 거칠게 안으로 헤집어 들었다. “아앗!!!” 게다가 남자가 육봉이 단단히 박힌 엉덩이를 양쪽으로 구멍을 닫듯 꾸욱 누르자, 그 생생한 촉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소는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정신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부터 간질거리던 배아래 쪽에는 사내의 것이 마구 움직이며 쾌감의 구석 구석을 찔러대기 시작했다. “…으윽…흑…” 개들에게 보여지며 당하는 자신의 굴욕감이나 삐뚤어진 욕정과는 상관없이 남자는 등 뒤에서 차갑게 중얼거린다. “발정기의 암캐 냄새를 맡고 온 것 같군.” “……!!!” “나중에 너를 형에게 선물로 줄 때 형이 박아주기 쉽게 길은 넓혀 놔야지, 안 그래?” “……!!!” 숨통이 꽉 죄여졌다. 몸이 저절로 긴장하며 남자의 것을 거세게 끌어당긴다. 그것에 만족한 듯, 삽입 된 것이 몸 안에서 요동을 쳤다. 눈앞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난잡한 쾌감에 마구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지소는 정말 넋 나간 인형처럼 입을 벌리고 타액을 흘리기 시작했다. 퍽퍽퍽, 피스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사내의 고환이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듯 두드리며 성노예처럼 다뤄갔다. 싫어, 싫어, 싫어… 라고 그 소리에 맞춰 끊임없이 고개는 흔들렸다. 입에서 단물이 날 정도로 거친 흐느낌이 간헐적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몸 안은 서글플 정도로 발정의 극에 달해서, 그는 개들이 보는 앞에서 짐승처럼 우우거리는 소리를 참으며 끝내 사정하고 말았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그의 손 아래에서 우유빛 액체가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지소는 뇌세포까지 전달되는 물씬한 정액 냄새에 그만 눈을 꽉 감았다. *** 식탁에 앉아서 말없이 노려보았다. 눈알이 떨어져 나갈 만큼 노려봤지만, 서인후는 개의치 않고 침착하게 밥만 먹고 있다. 그 모습을 보자 한대 쳐주고 싶었다. 지소는 부들 부들 떨리는 분노 때문에 숟가락을 꽉 쥐고 있었다. 마침내 김여사가 내실로 조용히 사라지고 둘만 남자, 지소는 그만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잔을 던졌다. 챙그랑- 파편들이 테이블 위로 떨어지자 예리한 유리조각이 날아다녔다. “…날 산 건 좋아.” “……” “하지만 난 개가 아니야.” 서인후는 말없이 젓가락을 들어 반찬에 박힌 유리조각들을 떼어낸다. 그 자세가 상당히 느긋하고 짜증스러울 정도로 조용해서 지소는 더욱 속이 할퀴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왜 그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알려줘.” 컵까지 던졌는데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걸 보며 지소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때서야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든다. “화가 많이 나셨군.” 미끈한 면상과 아름다울 정도로 잘생긴 생김새도 별로 위로가 되지 못했다. 지소는 뇌가 흔들릴 정도로 수치감과 쾌감을 반복적으로 느꼈고, 몸에 길들여진 그런 감각이 눈물 나게 싫었다. 그가 자신을 창부로 취급하는 건 상관없지만, 물건처럼 취급하는 건 화가 났다. 아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서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이상한 일이다. 가게에서는 수백 번도 더 겪은 일인데, 그 때는 이렇게까지 관계가 끝난 다음에 서글프지 않았다. 허탈하고 아프지도 않았다. 그 때와 지금에 있어서 다른 점은, 가게에서는 더 모욕적인 일을 당해도 그들과 식탁에 앉을 일이 없다는 점이고, 지금은 어찌 되었건 얼굴을 마주 보고 앉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말했지, 서인후.” “……” “나를 계속 가지고 놀 생각이라면, 그 악랄한 취미에 맞게 차라리 묶어 놔. 그래야 나도 포기를 하지.” “……” “식탁 아래에 묶어 놓고 혀를 내밀고 음식을 먹게 하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몰라? 인간답게 대해주는 척하지 말라구!!!” 그러나 조금 높아진 음성에도 상관없이 서인후는 피식 웃었다. “좋은 생각이야.” “……!!!” “다음에 또 나를 화나게 만들면 그렇게 꼭 해보지.” “내가 널 무슨 일로 화나게 만들었다고 그래!!!” 급기야 고함이 튀어나온다. 서인후는 그 모습을 보며 흡족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신의 조금 거칠어진 숨소리를 약 올리듯 입을 연다.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 “강주원을 좋아하지? 그러니 얻어터지면서도 그 녀석을 보내고 다른 놈을 손님으로 받았겠지. 넌 그 녀석이랑 자지 않았어.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과는 자지 않는다는 게 그 세계의 순정이니까.” “……!!!”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어설픈 오기로 바락 대든 것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문득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르던 심장이 천천히 맥박수를 접어간다. 지소는 아무 말 없이 짙은 낭패감에 그를 쏘아보았다. 그 모습을 사심없이 쳐다보며 서인후는 조용히 말했다. “내가 너에게 남창이라는 걸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고 한 건…” “……” “너답게 살란 말이다, 윤지소. 6년간의 기억이 자기 연민으로 바뀌거나 위장되진 않는다는 말이다.” “……” “강주원을 좋아하면 좋아해도 돼. 얼마든지. 그 녀석에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너를 바꾸어 주지. 그렇지만, 외부적인 게 아무리 변해도, 네가 몸을 팔았다는 건 바뀌지 않아.” “……” “내가 화가 난 이유는 그거다. 보다 나쁜 피 답게 굴라고 했지? 그게 명령이야. 넌 몸을 팔았지만, 네가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설령 원해서 했던 짓이라도, 네가 이미 겪었던 일이라면 그게 끝이야. 과거는 망령이 아니니 시달리지 말란 말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게 오한이 든다. 지소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 녀석이. 그러나 적어도 서인후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굉장히 진지한 어조로 그리고 엄격하게 말했다. “네가 남창 출신이라도, 네가 스스로를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면, 아무도 널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 “……!!!” 그러니까… 말의 요지는… 그러니까, 저 미친 놈이 화가 났던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부끄럽다고 여겼던 잠깐의 삐딱함 때문에? “마음껏 삐딱해져라, 윤지소.” “……” “대신 네 태생을 인정하면서 당당하게.” 그 깊고 울림 좋은 목소리가 어쩌면 최면 현상이 아닐까. 지소는 허리 아래까지 전율이 일었다.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 앞에서 하고 싶진 않아.” 애써 미묘하게 몸 안에 이는 붉은 맥박을 잠재우며 지소는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남자는 피식 웃는다. “그럼 다음 번에는 사람 앞에서 해 주지.” “……!!!” “그렇게 당하고 싶으면 또 나를 화나게 해 봐.” 지소는 조금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자신이 거짓말을 좀 하고, 스스로의 과거에 맥 빠졌던 게 왜 그렇게 그를 화나게 만들었다고… “뭐, 사실은…” 그때 남자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며 무심하게 중얼거린다. “다른 이유로 좀 더 화가 났을 뿐이지만….” “……???” “그건 다음번에 말해줄 생각이야.” 기분은 다소 나아졌다. 그렇다고 용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교복 맞추러 내일 모레 같이 가.” “……!!!” 그 때 그가 그 말만 안 꺼냈다면…. “학교 다니고 싶잖아, 안 그래?” 지소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서인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묻는다. 그 표정이 하도 무심해서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저… 저 미친놈이자, 재벌가의 황태자 이자, 어쩌고 저쩌고 한 똘아이 같은 놈이 뭐 어쩐다고? “그래도 비싼 놈인데 벌거벗겨서 리본만 묶은 채로 형에게 데려갈 순 없잖아?” 콜록 콜록-. 지소는 문득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걸 지금 농담이라고 한 건가? “그러니 기분 풀어라.” “……!!!” “교복을 입고 예쁘게 웃어주면 개 앞에서만은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맹세하지.” 마침내 지소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말았다. 정말 악질인 녀석이다. *** 중역들과의 회의는 너무나 지루했다. 기영이 옆에서 부지런히 체크하고 있었지만, 인후는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차가운 태도로 상석만 지키고 있는 자신을 향해, 구매 쪽 사장이 못마땅한 듯 노려보고 있었다.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다. 회의는 형식적인 것이고, 그들이 어떻게 우기던 자신의 선택이 틀린 적은 거의 없었으니. “지겨워하시는 게 너무 표가 납니다.” 회의를 끝내고 고급 의자가 즐비한 회의실에서 의자를 돌리고 있자 기영이 말했다. 인후는 그를 힐끔 쳐다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루하니까.” “…그래도 일하시는 기색이라도 보이셔야죠.” “계약직 건에 관련 된 서류만 책상에 올려.” 기영의 염려어린 한 마디에는 관심도 없이, 인후는 건조하게 말했다. 곧 기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블에 널려진 서류들을 챙기기 시작한다. 최근에 호텔 쪽에서 계약직 문제로 말이 많아졌다. 인후의 입장에서는 결단을 내려야 하는 부분이라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머지는 솔직히 들어봤자 필요없는 보고였고, 싫증나는 이야기들이었다. “오늘 저녁에 교복 맞추러 가신다고요?” 왠지 기영이 즐거운 기색으로 말했다. 인후는 표정 없이 눈썹을 쓰윽 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왜 자네가 기쁘지?” “……!!!” 순간, 기영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선우기영과 일한지 오래되었고, 게다가 기영은 자신이 꽤 어릴 때부터 같이 자주 보던 회사 중역이었건만… 그가 당황하는 모습은 거의 처음 보았다. 살짝 눈가가 붉어지는 얼굴로 삼십대 후반의 잘생긴 비서는 중얼거렸다. “아니… 그게…” “……” “뭔가 이사님이 새로운 일을 하신다는 게 신기해서…” 날카롭게 쏘아보자 더 말끝이 흐려진다. “좀 놀라운 일이기도 하고…” “……” “새삼 그런 모습은 처음 뵙는 거라서…” 횡설수설. 인후는 그의 모습에 웃음기도 없이 딱 잘라 말했다. “사실은 녀석에게 교복이 썩 어울릴 것 같아서 좋아하는 거겠지, 기영씨.” “……!!!” “형님의 취향대로 해 주는 것 뿐이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서류나 준비해.” “…네.” “어차피 위장이니까 매수도 잘 하고.” “…네.” “나가서 그 녀석에게 전화해 놓으라구. 5시경에 데리러 간다고 해.” 기영이 뭐라고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꼭 그런 이유라면 굳이 학교에 보내실 이유는… 이라고 들려온다. 인후는 그런 기영의 옆모습을 한번 짜릿하게 노려본 후에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넓은 회의실의 문이 기영이 사라지며 굳게 닫힌다. 인후도 대충 일어나서 자신의 사무실로 향할 생각이었다. - 이사님, 직통 전화 입니다.- 그 때 하필 키폰이 울린다. 그는 좀 귀찮은 생각으로 팔을 뻗어 내선을 연결했다. “서인후 입니다.” 단조로운 목소리에 상대방이 잠시 침묵을 지킨다. 인후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놓은 자켓을 거머쥐며 누차 반복해서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서인후 입니다.” 그 때서야 조심스레 저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 으아우…- 사람의 소리와 흡사한 그 목소리에 인후는 잠시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여보세요?”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 스민 그 음성에 상대방이 더 울먹이듯 뭐라고 소리 질렀다. -아우아수하…- 서인후의 매끈한 얼굴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는 수화기를 꽉 쥔 채 가슴이 크게 들썩일 만큼 숨을 들이마시었다. 그리고 천천히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가연이냐…”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톡톡톡 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인후는 눈을 꽉 감고 조용히 말했다. “어디야.” -…아우아…- “데리러 갈게.” 그는 손목시계를 잠깐 확인하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가. 7. Fighter 지소는 세수를 막 끝냈다. 거울을 막연히 들여다보며 그는 뜬금없이 한번 씩 웃어보았다. 여전히 얼굴은 갸름하고 핏기가 좀 없지만 예전보다는 확실히 좋아졌다. 그는 무심결에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희한한 일이다.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턱을 조금 쳐들자, 사뭇 두 눈이 도전적으로 강해보인다. 지소는 조금 더 깊게 입꼬리를 올렸다. 좋다, 마음에 든다. 뭐, 썩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거울도 보기 싫어했던 자신의 과거보다는 한결 나아보인다는 의미다. 쌍커풀 없이 위로 조금 치켜떠진 눈매가 매섭다. 그는 자신이 언제 이런 눈길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신기했다. 그리고 어떤 목소리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서인후의 고양이군.’ 서윤호가 했던 말이다. 그 싸가지 없는 개같은 놈이. 지소는 거울에 얼굴을 더 바싹 붙이며 의아한 기분으로 스스로를 관찰했다. 자신이 고양이처럼 생겼나? … 아무리 봐도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와, 웬일이냐?” 스킨을 적당히 바르고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기영이 주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보자마자 시비다. 지소는 조금 눈을 내리깔며 다소 쌀쌀맞게 응수했다. “뭐가…?” 기영이 매끈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며 놀리듯 씩 미소지었다. “웃고 있잖아.” “…내가 언제.” “내려 올 때까지 웃고 있었으면서.” 시치미를 뚝 떼며 지소는 잠시 주변을 힐끔 둘러본다. 서인후는 아직 안 온 모양이다. 사실 그 녀석이 오든 말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오늘 교복을 맞추러 간다는 것 뿐이다. 교복이라… 뭐, 그 또한 그다지 관심은 없다. 자신의 관심은 교복이 아니라, 학교라는 존재에 있다. 그래, 어쩌면 그 개 같은 변태 새끼, 서인후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학교에 가고 싶었다, 계속. 정확하게 말하면, ‘공부가 하고 싶다’ 가 아니라, ‘학교에 가고 싶다’가 맞는 말이다. 솔직히 가서 잘 견딜 자신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평범한 가족들 틈에서 학교를 다닐 친구들을 만날 용기도 없다. 그래도 자신은 아직 어린 게 맞는 거 같다. 열여덟이면 몸도 거의 청년에 가까운데 사실 기분이 묘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기영은 자신이 그런 까닭으로 슬며시 웃고 있었음을 눈치 깐 것이다. “…이사님 찾고 있지?” 달칵. 기영이 내려놓는 머그잔이 둔탁한 소리를 낸다. 지소는 표정을 싹 굳힌 채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 저었다. “내가 왜?” 그 인간은 돈만 내면 되지…. 그렇지 않아도 지독한 짓을 시켰는데 말이야. “이사님 오늘 못 온다.” “……!!!” 기영이 자못 동정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지소는 잠시 불쾌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갑자기 붕 떠 있던 자이로드롭이 공중에 딱 멈춘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혹은 신나게 달리던 차가 정체된 도로를 만났거나… 어쨌든 그런 기분. “나한테 따지듯 쳐다보지 말라구.” 따지듯 쳐다본 적 없다. 지소는 이유모를 허탈함은 살짝 달래며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 당황한 모습에 기영이 장난스럽게 조금 웃는다. “내가 따라가기로 했으니 너무 걱정 말지 그래.” “걱정하는 거 아냐.” 그러나 기영은 어딘가 투덜거리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며 한번 씩 웃었다. 지소는 쓸데없는 실망감을 삭이며 털썩, 그의 옆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쩐지 맥이 풀린다. *** “어머, 전학 가는 거냐?” 치수를 재며 교복집 여자가 수선을 피웠다. 40대 이상은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기영의 잘생기고 인상 좋은 얼굴을 보자 곧 홍조를 띄며 자신을 향해 말했다. 지소는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워 그저 가만히 있었다. “셔츠는 세벌 정도면 충분할 거고, 아직 동복을 입을 기간은 아니니까 코트는 천천히 찾으러 와요.” 기영이 여주인의 말에 살짝 웃었다. 지소는 모처럼 흥미롭던 기분이 싹 가시며 무료하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치수를 다 잰 주인 여자와 기영이 뭐라고 저 쪽에서 한참을 이야기 중이었다. “어느 집 도련님이야?” “왜 그런 질문은…” “K고등학교면 잘사는 도련님들이 가는 곳이잖아.” 여주인은 친근감 있게 기영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그러나 거기서 느껴지는 속물적 느낌에 지소는 고개를 조금 돌렸다. 지루하다…. 왠지…. “주인 아줌마가 너더러 너무 잘생겼다는군.” 기영이 쇼핑백을 들고 나오며 자신의 팔꿈치를 잡아 일으켰다. 지소는 발을 끌 듯 걸어가며 탕- 하고 유리문을 아무렇게나 닫고 나온다. 사실 문 따위에 신경 쓰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윤지소.” 그러나 기영이 재빨리 자신을 부른다. 그는 교복집의 앞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느긋하게 문을 가리켰다. 방금 자신이 소리나게 닫고 나온 그 문이다. 눈썹을 쓱 올리며 무료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기영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작게 말했다. “다시 문 닫고 나와야지.” “……???” “가서 주인 아줌마에게 교복 멋지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하고,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나와.” “……!!!” 지소는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별 말 같지도 않은 말이라는 듯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기영은 포기하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이며 빙긋이 웃었다. “이사님은 널 버릇없이 키울지 모르겠지만…” “……” “난 말이지… 이 집안에서 괴물은 하나로 족해.” 그 말에 왠지 변태 독종 서인후를 모셔온 그의 노고가 엿보인다. 지소는 좀 당황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찡그린 자신의 얼굴과는 상반되게 그는 친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놀리듯 말했다. “어서요, 도련님.” “……” “부탁드립니다.” 지소는 자신이 여전히 어리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그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갔다. 처음보다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기분이 다운 된 것은 선우기영의 잘못이 절대 아니니까. *** “아이스크림 사줄까?” 기영이 운전을 하며 넌지시 묻는다. 지소는 기가 막혀서 그를 한번 힐끔 쳐다보았다. 자신이 별 말을 하지 않으니 점점 점입가경이다. 하긴, 이 인간은 처음부터 계속 이런 식이었다. “내가 애로 보여?” 단조롭게 묻는 질문에 기영이 피식 비웃듯 미소지었다. “다 큰 것 같지는 않은데.” “……” “그만 표정 좀 풀지 그래. 나도 좋아서 따라다니는 거 아니니까.” 그래, 뭐… 이 사람도 그렇지. 지소는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 기영이 좀 스피드를 내며 운을 뗐다. 지소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창밖만 바라본다. 어차피 대답같은 거 안 해도 잘 떠드는 녀석이다. “네가 있었던 고아원 말이다.” “……” “처음에 어떻게 거기 들어갔는지 수녀님들한테 들은 거 없나? 하다못해, 버려졌을 때 어땠다든지… 것도 아니라면 누군가 맡겼다든지…” “……”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 “여전히 황송하게 만드는군.” 남자는 다시 비아냥거린다. 묵묵히 입술을 일자로 만들며 지소는 표정없이 바깥만 쳐다보았다. 사실은 머리 속으로 진지하게 떠올려 보는 중이었다. 원장수녀님이신 베로니카 수녀님께 뭔가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원체 관심이 없어서, 또 알아봤자 별달리 달라질 것도 없어서… “고아원에 있었다면 그런 생각 하지 않아?” 영 말이 없자 기영은 혼자 씁쓸하게 중얼거린다. 서인후가 타지 않은 고급 승용차에서, 선우기영은 꽤 불량스런 카레이서였다. 담배를 한 쪽으로 비스듬히 물고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그러나 매우 빠른 스피드로 차를 몰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싶어서 돌아보자 남자는 혼자 뭐라고 소곤거렸다. “왜, 꼬마들 동화에 보면 나오잖아. 아기 때 버려졌어도 꽤 멋진 재벌집이나, 왕가나… 뭐 아무튼 높은 신분의 부모님이 찾으러 올 거다, 뭐, 이런 생각 말이다.” “……” “넌 정서가 완전히 메말랐냐? 그런 생각도 안 해봤어?” 지소는 무표정하게 남자를 응시했다. 창 밖으로 생생 거리 풍경이 지나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용히 말했다. “동화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 “읽어본 적도 없고, 읽어준 사람도 없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그 때, 아마도 살짝… 기영의 얼굴이 좀 달라졌다. 내내 조금은 비웃고 조롱하고 놀리는 듯한 어른의 여유가 갑자기 사라진 기분이었다. 지소는 자기가 뭘 잘못 대답했는가 해서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문득 끼익- 요란한 타이어 소리가 들려온다. 지소는 잠시 앞으로 기우는 몸을 바로 잡으려 애썼다. 신나게 달리던 차가 예고도 없이 길가에 갑자기 멈춘 것이다. 이 인간이 왜 이래, 라는 눈길로 지소는 기영을 노려보았다. 심장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 “우리…” 그리고 기영이 비로소 핸들에서 시선을 뗀다. 그는 차를 불시에 멈추고도 한참을 화가 난 사람처럼 핸들만 쏘아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입을 열며 돌아봤을 때는 그 난폭한 정차가 몇 초 지났을 때였다. “우리…” “……” “저녁 먹고 들어갈까, 도련님?” 지소는 이 곳에 온 이례로 서인후 외의 녀석과 밥을 먹은 적이 없었다. 있다고 해도 김여사가 차려주는 식사가 전부였다. 특히나 저녁 식사는 혼자 먹거나 서인후와 먹거나 대개 둘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오늘은 약속을 먼저 어긴 게 그 괴물 녀석이다. 뭐, 지킬 약속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어차피 그 막대먹은 취미 생활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밥을 사주면…” 지소는 무심하게 그에게 물었다. “밥을 사주면… 여관에라도 들렸다 갈 거야?” “……!!!” 그러자 신기하게도, 자신은 가게에서 나온 후로 서인후 외에 다른 녀석과 친밀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습관적으로 물은 말이었는데… 남자는 기습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 선우기영은 핸들 위로 양팔을 올린 채 매우 기가 막히다는 듯 허허 거렸다. “아니.” 그리고 분명히 대답했다. “밥만 먹으면 돼.” 그렇게 말하는 기영의 표정이 어딘가 이를 악문 것처럼 보여서 지소는 목덜미를 긁으며 짧게 고개 끄덕였다. 어차피 서인후 같은 건 자신이 뭘 하든 신경 안 쓸 테니 상관없었다. *** 비서지만 꽤 높은 거야.- 라고 생각했다. 지소는 오랜만에 편한 생각이 들었다. 사실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분이 상당히 저조했었는데, 저녁이라도 근사하게 먹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게다가 잘은 몰라도 기영이 보여준 조금은 인간적인 면들이 좋게 느껴졌다. 이 집안의 인간들은 다 썩었을지 모르지만, 이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꽤 인내심이 깊은 것 같다. 김여사님도, 성우민도, 그리고 이제는 선우기영도. “이상한 걸?” 선우기영이 집에 도착해 차를 지하주차장에 대며 중얼거렸다. “……?” 지소는 기영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커다랗고 언제나 조용한 집을 한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기영이 뭣 때문에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집은 늘 그렇듯 굉장히 조용하고 정적에 휩싸여 보였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지하주차장에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지하의 내실을 거쳐서 두 계단을 오르면 바로 1층으로 가는 구조였다. “아무래도 이상해.” “……?” 다시 뜬금없이 던지는 기영의 말에 물끄러미 쳐다본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 기영은 내내 기분이 좋아보였다. 예의 바르고 잘생기고 친절하기도 하고 가끔은 짓궂기도 한 손님을 받아본 적이 없는 지소는 처음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애써 무뚝뚝한 태도를 유지했지만, 선우기영이 타인의 기분을 감싸는 재주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긴, 그게 관록이라는 거겠지. “집안에 모두 불이 켜져 있어.” 1층 거실 안 쪽으로 향하며 기영이 중얼거린다. 그 때서야 그가 뭣 때문에 이상하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과연, 집 안은 이상할 정도로 온 구석 구석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이 넓은 집안에 사는 인간이 달랑 두명이고, 오고가는 사람도 많아야 다섯이 안 된다. 늦은 저녁 시간이나 밤에는 기영 말고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그간 이렇게 불이 켜져 있는 집은 본 적이 없다. 꼭 누군가를 환영하는 것 같이 밝고 화사해보였다. “……!” 기영이 뭔가 빠른 걸음으로 서재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 지소는 미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괴물의 은신처에 뭔가 변화가 생겼다. 이상한 일이다…. 편안하지 않은 두근거림이 연이어 갈비뼈를 자극해간다. 그리고 우뚝…. 기영이 1층의 서재를 지나 큰 유리문을 여는 순간, 지소는 이 집의 가장 큰 변화가 뭔지를 알아차렸다. “가연 아가씨.” - 라고 기영이 말했다. 단걸음에 다가가 어떤 여자의 손을 잡았다. 언제나 불이 꺼져 있던 정원의 가로등도 잔뜩 밝아 있었다. 초록의 맑은 불빛이 반짝이는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지?” 그 여자와 잔디 위에 서 있던 남자가 마침내 말했다. 그러나 지소는 여자를 쳐다보며 문득 숨을 훅, 하고 들이쉬었다. 긴 파마머리를 부드럽게 땋고 있는 여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게다가 선하고 아름다운 눈매는 가늘게 휘어지며 선우기영을 향해 웃어보였다. 기영이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자, 여자는 여신처럼 웃었다. 그래, 꼭 여신처럼. “언제 오셨습니까.” 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지소는 유리문 앞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모르는 여자다. 또한 자신을 부르거나 초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짧은 몇 주 동안 어쩌면 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사내가 그녀와 기영을 보며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 놀랍다. 그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는 선우기영이 아니라, 큰 값을 치루고 자신을 빼내왔다는 빌어먹을 젊은 이사 말이다. 지소는 갑자기 땅에 단단히 묶인 기분이 들었다. 뭔지는 몰라도 정말 예감이 안 좋아진다. 게다가 말로만 들어온 그녀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택도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자신의 그런 곤란함이나 묘한 기분과는 상관없이 자기들끼리만 아는 세 사람은 상당히 오붓한 분위기였다. 이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란 말이지…. 놀라울 정도다. “제가 모시러 갔을 텐데요.” 선우기영이 가연이라는 여자를 향해 애틋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자 여자가 뭐라고 뭐라고 손으로 수화를 한다. 그녀를 보자 가게에 있던 벙어리 총각이 떠올랐다. 말을 할 줄 모르던 그 녀석은 수화도 할 줄 몰랐다. 어디 교육을 받았어야 그 정도라도 알 텐데, 너무 어릴 때부터 가게에 길러져서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아우’와 ‘으아어’같은 말들이 전부였다. 그 녀석은 꽤 많은 걸 표현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했다. 그 녀석과 저 여자의 차이는 그 녀석은 가난하고 버려졌지만, 저 여자는 그래도 명색이 재벌집 딸이라는 것이다. “이사님, 그럼 정후 도련님은…” 지소는 아무도 자신이 거기 있는지 기억치 못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서정후와 저 가연이라는 여자에 모든 것이 향해 있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아… 맞다. 나는 목적이 있어서 데리고 온 놈이었지…. 저 여자를 위한 목적이…. “형도 곧 연락을 하겠지.” 자신이 아는 한 변태 일인자 냉혈한이 말했다. 여전히 이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어제 저녁까지 보았던 그 서인후가 아닌 것 같았다. 집안에 꽉 찬 듯한 밝은 불빛 때문인지, 혹은 가연이라는 여자 때문인지 굉장히 밝아보였다. 그것을 드러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생히 전달될 정도였다. 일단 그 매서운 눈매가 조금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심지어 웃기까지 했다. 가연을 쳐다볼 때는 따뜻함이 엿보였다. 하긴, 누구라도 그럴지 모른다. 가연이 따뜻하게 웃었기 때문이다. “가연이는 우리 집에 있는다.” 서인후가 선우기영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마저도 언제나 듣던 사무적인 기색이 반쯤 빠져 있었다. 왜 일까…. 지소는 속이 좀 답답해졌다.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게 저녁을 너무 거하게 먹은 것 같다. “어떻게 모시고 오신 겁니까?” 기영이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지소는 그 쯤에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던져진 쇼핑백을 들어올렸다. 교복 집 아줌마가 이것 저것 막 챙겨주셨다. 교복은 삼일 뒤에 찾으러 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바로 그 때, 가연이라는 여자가 문가에 선 자신을 가리키며 서인후의 팔을 마구 잡아당겼다. “…응?” 남자는 부드럽게 여자를 향해 고개 숙였다. 눈꼬리 끝에 살짝 걸리는 그 광경을 보며 지소는 쇼핑백을 들고 돌아섰다. “아냐, 아무 것도 아냐.” 그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여자가 물었을 것이다. 윤지소가 누구냐고, 혹은 어떤 사이냐고. 누구나 의례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묻는 질문이다. 그래서 남자가 대답한 것이다.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오늘은 피곤할 테니까, 내일 정식으로 인사하지.” 남자는 여자에게 덧붙였다. 지소는 그런 목소리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뭔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는 재빠르게 2층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르던 개는, 서열이 높은 개가 들어오면 어차피 주인의 발치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 개가 주인이 아니라 뭔가 다른 걸 목적으로 거두어 진 거라면 더욱 그렇다. 8. Fighter 꿈속인가 싶을 정도로 아득하다. 뭔가 짓눌린 기분이 들며 지소는 몇 번이나 몸을 뒤쳤다. ‘누가 내 이름을 지소라고 지었지?’ 참 이상한 일이다. 자신은 열여덟을 먹었는데, 눈앞에는 훨씬 어린 시절의 윤지소가 맑은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리고 베로니까 수녀님…. 알게 모르게 늘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그 분이 인자한 미소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가 지었지.’ 지소는 방문객 중에 누군가 두고 간 하드를 먹으며 중얼거렸다. ‘췌…내가 엄마가 어딨어.’ 그 퉁명스러운 말투에도 베로니까 수녀님은 웃으며 말해주었다. ‘이 다음에 지소가 훨씬 더 크면 엄마가 찾으러 올 거야…’ ‘훨씬 더 언제?’ ‘키가 놀이터 철봉에 닿을 만큼 크면…’ 거짓말. 지소는 어느 순간 훌쩍 커버린 자신의 키를 바라보며 꿈속에서도 한숨쉬었다. 전부 거짓말이다. 어른들은 늘 사기에 강하다. 자신이 아는 어른들은 대개 두 가지 경우다. 면전에서 잘 해주고 뒤통수를 치거나, 어쩌다 한번 잘해주고 약속을 어기거나…. 이렇게 두 가지. 잠에서 깨어나자 어딘가 명치가 아파왔다. 지소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새벽을 보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다. 그는 침대에 앉아 환한 아침이 올 때까지 불안하게 손톱을 뜯고 있었다. 점점 더 뭔가 알 수 없는 검은 늪이 자신을 죄여오는 기분이었다. 원래 자신은 편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 더욱 그렇다. *** “아침을 안 먹는다고?” 기영은 오랜만에 서인후의 집에서 잠들었다. 밤늦도록 집 안의 칵테일 바에 앉아 재회를 만끽하다 그리 되었다. 늦잠을 자고 아침을 먹으러 나오니 이미 인후와 가연은 말끔히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들어서자마자 자신의 상관이 뱉은 말이 저것이다. 아침을 안 먹는다고?- 라는 무표정한 질문. 아하, 누구를 향한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아침 식탁에 나오지 않은 유일한 사람, 윤지소를 일컫는 말일 거다.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아요.” 김여사님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말했다. 그러자 가연이 테이블을 몇 번 톡톡 두들기며 인후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모양을 보며, 기영은 머리를 긁적이고 자리에 앉았다. - 데리고 와. - 가연이 손으로 말했다. 서인후가 유일하게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상대였다. 기영은 찬 물을 벌컥거리며 자조적인 표정으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데리고 오죠.” 그러나 잠깐 내분이 있었다. 인후가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 저은 것이다. “굳이 먹지 않겠다는데 애도 아니고 왜 달래야 하지?” 물론 안가연도 만만치 않게 인상을 찡그린다. - 아직 애야.- “열여덟이면 이제 다 컸어. 그 녀석 체격을 봐. 좀 마르긴 했지만 애는 아냐. 숟가락까지 쥐어다 줄 정도는 아냐.” 기영은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가 기분이 나쁜 거겠지, 뭔가가…. 황송하지만 모시러 가야지. “두 분 식사 먼저 하십시오. 제가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일에 비서가 필요하니까. “그만 둬.” 서인후는 이미 끝난 말이라는 듯 쌀쌀맞게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한숨이 나온다. 왜 그럴까. 은근히 신경 쓰인단 말이다. 안가연의 말처럼 지소가 다소 어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혹은 평탄치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제 생각에는…” 가연이 불만스럽다는 듯 입을 내밀고 있었다. 기영은 그런 그녀를 향해 살짝 웃으며 상관에게 모처럼 반항을 해본다. 그래도 먹을 건 제대로 먹여야 한다. 자신의 얼음같은 괴수 상관이 애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뻔한 일이니까. “제 생각에는 기분이 좀 안 좋아서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 은근히 책망하는 말투에 인후가 살짝 시선을 들었다. 그게 뭐?- 라는 무신경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기영은 스스로의 처지가 아주 비관적이 되는 기분이다. 이대로 정후 형님이 나타나시면 아주 끝장나겠군.- 이라는 생각이. “어쨌든 약속을 먼저 어긴 건 이사님이시니까요.” 부드러운 말투에도 서인후는 눈썹만 조금 움직였다. 하긴, 이런 게 통할 리가 없지. “게다가… 솔직히 십대를 상대하기에는 이사님이 좀 무리이기도 하구요.” “……” “아무리 사내놈이라도 한창 예민할 시기입니다. 좋은 꼴만 보고 산 놈도 아니고, 제 딴에는 힘들 텐데 적당히 대하시죠.” “……” 그 때 갑자기 서인후가 잠깐 시선을 돌렸다. 뚜렷한 눈매가 긴 속눈썹의 그림자에 잠겨들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뭔가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흠칫, 선우기영은 그 쯤에야 입을 다물었다. 주인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항상 뒤끝이 안 좋았다, 씨발. “반했나?” 그리고 물었다, 반했냐고. “…네?” 내내 무표정하던 서인후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냉정하게 쳐다보았다. 언제나 정글의 무법자같은 그 도도한 시선에 기분이 상한다. “어제 왜 늦었지?” 기영은 아뿔사, 라고 작게 탄식했다. 아직 지소의 출신이라든지, 이 집에 오게 된 배경, 혹은 서인후라는 작자가 얼마나 난폭자인가를 모르는 가연만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씽크대 앞에서는 이 집에서만 오래된 연륜을 자랑하는 김여사가 팔짱을 낀 채 ‘흐음’이라고 희미한 소리를 낸다. 기영은 혀끝을 살짝 물린 기분이었다. “같이 저녁을 먹었을 뿐입니다.” “……” 아주 평범하고 솔직한 대답에도 서인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적극적으로 뭔가 변호하는 건 처음 보는군.” “……!!!” “내 전임 비서로 일한지가 몇 년이고, 거의 스무 살 때부터 우리 집안과 일한 것도 몇 년인데, 서른 일곱의 남자인 당신이 그렇게 누군가를 변호하는 건 처음 봤다고.” “…이사님…” “선우기영이란 인간은 변죽을 울리는 인간으로 유명한데 말이야. 그게 자네 처세술이지. 나 같은 놈에게도 잘 맞출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간이니까.” “이사님…” 그의 눈끝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기영은 한사코 아닌 기분에 손을 휘휘 저었다. “오해십니다.” “……” “저는 그저, 어제도 이사님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고 약속을 깨시고…” 그 녀석은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지…. 당신이 저 계단에서 내려올 때 그 녀석 표정을 좀 봤어야 해. 처음으로 웃는 걸 봤단 말이다. “가연이 아가씨와 소개도 안 시켜주시고.” “……” “게다가 가연이 아가씨가 소개 해 달라고 말씀하셨을 때, 마치 지소가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냥 취급하셨습니다.” 그러자 서인후가 다시 눈을 반짝이며 씩 웃었다. “내가?” 기가 막혔다. 당연히 당신말고 누가 그러겠는가. 기영은 다소 강한 어조로 진중하게 단어를 골라야했다. “네.” “어떻게?” “가연이 아가씨가 피곤하니까 오늘 정식으로 인사하자고…” 가연이 그 말에 턱을 괴고 인후를 쳐다봤다. 서인후는 자신이 뭐라고 했는지 떠올리는 기색이었다. 그는 잠시 의자에서 몸을 움직이며 미간을 살짝 흐린다. 기영은 그가 자신에게 뭐라고 말할지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남자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을 때는 좀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런 적 없는데.” “…네?” “가연이가 피곤하니까 나중에 소개하자는 말이 아니었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 “그 녀석이 피곤하니까 나중에 인사하잔 말이었지. 그 녀석 어제 늦게 들어왔잖아? 생전 처음으로 교복이나 맞추러 갔으니 피곤했을 거다, 뭐 이런 말이었다.” “……!!!” 기영은 살짝 뒤로 물러났다. ‘늦게 들어왔잖아?’라고 말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상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제 가연이 때문에 깜박 놓치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계속 왜 그들이 늦게 들어왔는지를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이지…. 계속…. 자신은 ‘피곤할테니까’라는 말이 의례히 가연 아가씨를 향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가연이 아가씨 때문에 놀랬으니까. 그러나 다소 귀찮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은 저 남자는 그게 아니라, 시종일관 밖에서 돌아오지 않는 자신들을 기다린 거다. 서로 그 순간에 몰입한 생각이 달라서 아주 단순한 한 마디 말도 오해를 낳은 것이다. 자신은 그가 가진 대화의 중심이 의례히 가연이일 거라고 여겼고, 아마 지소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그러나 이 남자는 그게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 순간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실 거면…” 기영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실 거면, 왜 애당초 약속에 못 온다고 직접 전화하지 않으셨습니까?” 기다리시는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서인후는 오히려 자신의 말이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가연이가 와 달라고 했으니까.” “……” “그게 왜 중요한지는 잘 알잖나.” 자신이 아는 한…, 인간 서인후는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다. 그가 유일하게 가슴을 가졌다고 느껴질 때는 안가연과 같이 있을 때 뿐이다. “아픈 녀석과 어린 녀석 중 누구를 더 신경 써야 하는지는 당신도 잘 알 텐데?” “……!!!” “둘 다를 챙길 수는 없는 거니까.” 기영은 마침내 이마까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주인의 무심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옳기 때문이었다. 안가연은 아프다. 아니, 정확한 말로 하면 죽어가고 있다. 그러니 서인후가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아 있는 것에 대해 추호도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 저 야수가 유일하게 웃음짓는 이유도 오직 그 때문이다. 안가연이 서인후의 미소를 기억할 날이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가영은 씁쓸하게 사과했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든다. 주인에게 참견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칙이 깨진 날이었는데, 깨고 보니 역시 결과가 마땅치 않는 것이다. 허나 서인후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 저으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신경 쓰지 말고 식사나 하지.” 그런 태도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가연이 자신을 보며 상당히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 “김여사님 그만 속 썩이고 밥 좀 먹지 그래?” 난데없이 등 뒤에서 들리는 말에 지소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성우민이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책들을 챙기고 있었다. 우민이 가져다 책들은 죄다 책장이 너덜 너덜 했다. 침대에 늘어놓고 멍하니 앉아서 책들을 넘기고 있었다. 뭐,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내용이 태반이지만. 예의없이 등장한 인물은 선우기영이었다. 지소는 그를 한번 쓱 쳐다보고는 아무 표정도 없이 다시 책들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가씨랑 이사님 병원 가셨다.” 기영이 침대 옆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지소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을 가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오해할까봐 하는 말인데…” 그러나 선우기영은 책들을 같이 집어 올리며 침착하게 말했다. “나름대로 새 생활이 시작될 테니까 기대도 많겠지만…” “……” “이사님은 많이 바쁘거든. 이제 어떤 사건이 또 터질지도 모르고… 게다가 가연이 아가씨는 누군가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고…” “……” “이사님은 정후 도련님을 꼭 찾아야 하거든. 네가 모르는 많은 일들이 이 집안에 있기 때문에… 오해하지 말란 말이지. 그러니까 내 말은…” 횡설수설. 이 똑똑하고 강한 비서가 왜 이러고 있나. 지소는 집던 책을 멈추고 가만히 한숨 쉬었다. 이내 냉소적으로 그의 말을 끊어야 했다. “왜 나에게 잘 해주려 그래?” “……!!!” 그러자 기영이 조금 당황한 듯 이상한 웃음을 짓는다. “이사님의 성격을 뻔히 아니까.” 그 대답에 지소는 그저 피식 웃었다. 자신이 서씨 집안에 대해 더 알아서 뭘 하겠는가. 알아야 할 이유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 딱딱한 말투에 기영이 잠시 헛기침을 했다. 그러나 지소는 개의치 않고 아침 내도록 생각한 말을 딱 부러지게 꺼내들었다. “나는 어리지만, 바보가 아냐.” “……” “서인후 그 자식이 나한테 잘 해주는 건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 비서 아저씨.” “……” “당신은 뭣 때문에 나에게 잘 해주려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내 처지를 잘 알아. 제일 처음에 당신이 나에게 경고했던 거잖아.” “…나는…” “됐어, 안 들어. 나는 이사가 안으려고 하면 안기고, 기라고 하면 기고, 다른 녀석에게 안기라고 하면 그것도 하고…” “…윤지소.” 갑자기 뚝, 말이 그쳤다. 지소는 목이 너무 아팠다. 그는 인상을 찡그린 채 칼칼한 목 너머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기영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재빠르게 덧붙였다. “난 물건이잖아. 그렇지?” “……” 이상하다. 목이 계속 아파서 침이 안 넘어간다. 지소는 조금은 울컥한 속을 다스리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상대가 고급스러워 진 것 뿐이지.” “……!!!” “달라진 거라곤 그게 전부지. 내 몸에 박아대는 좆은 여러 개지만, 그 중에서 누가 더 비싼 값을 내느냐의 차이 뿐이라는 거야. 안 그래? 달라진 건 없고, 그저 주인이 바뀐 거야. 나도 알아. 그러니까…” 말끝이 점점 더 신랄해진다. 목소리도 점점 높아졌다. 어쩐지… 지소는 자신이 속도감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잘 해주는 척 안 해도 돼, 비서 아저씨. 나도 내 역할이 뭔지 알 거든? 예전처럼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난 그거 잘 해.” “……” “절대 거절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당신이 걱정하는 게 그런 거라면 신경 꺼. 대신 당신들이 뭘 작당하는지 몰라도, 죽이지만 마. 나도 당하는 만큼 보상받고 싶거든. 지금까지 주는 것만큼 넉넉히만 주면 돼.” 뭔가가 부글부글거린다. 견딜 수 없는 감정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리게 만들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성대가 찢기듯 아프고, 눈알에 금이라도 간 것처럼 시리다. 지소는 원래 말이 많지 않았다. 기영 역시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뭔가 말을 꺼내기 위해 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말을 하면…” 기영이 초조하게 손바닥을 비비며 자신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을 하면…” “……” “스스로 상처 받잖아. 그렇지?” 그 말에는 도저히 대답을 못하겠다. 지소는 잔뜩 부은 것 같은 목 너머로 침을 애써 삼켰다. 선우기영이 뭔가 착잡한 표정으로 손끝을 매만졌다. 지소는 마치 그와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 채 굳어 있었다. 인형이다, 인형. 뭔가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어차피 힘없고 싸울 줄 모르는 사람들은 짓밟히는 세상이라는 걸 잘 안다. 서인후는 자신에게 ‘힘없는 인형이 아니라 다행이다’라고 말했지만 죄다 거짓말이다. 거짓말….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면서. 지소는 자기 자신에게 쓴 웃음을 지었다. 위통이 격렬하게 신경을 짓눌러댄다. “멋져.” 짝.짝.짝. 그 때였다. 누군가 자신의 방 문가에서 요란하게 박수를 치며 웃어댔다. 시큰하게 솟아나는 위액과 격통을 참으며 지소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 쪽을 노려본다. 이내 자신의 시력이 의심되었다. 서윤호였다. 서씨 일가의 마지막 황태자, 서윤호. 언젠가 그 본가에 갔다 험한 꼴을 당하게 만들었던 장본인. 놀라서 멈춰버린 자신을 대신해서 기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웬일이십니까?” 기영 역시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윤호를 정중하게 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게 그 작위적인 태도는 아무 내막도 모르는 자신에게까지 전해져 온다. 서윤호 역시 그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에 미끈한 미소를 실실 지으며 웃었다. “동생이 형을 보러 오는데 이유가 있나?” 기영이 침착한 표정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어딘가 딱딱하고 권위적인 느낌이었다. “형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아하~ 고양이 먹이라도 사러 갔는가보지?” “……” 아무래도 가연이라는 여자가 이 집에 있다는 걸 들키면 안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기영이 윤호의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겠지. 사실은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서인후는 비련의 여주인공 안가연과 병원에 가셨다- 라고. “내 얼굴에 도장 찍었잖아, 윤지소.” 서윤호가 빈정거리며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영문을 모르는 가영이 험악한 인상으로 자신과 윤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지소는 욱하던 기분을 감추고 냉철하게 그를 쏘아보았다. 기분 나쁜 녀석…. 버릇없는 재벌가의 개망나니…. 더 나이가 들면 제 형하고 똑같겠지, 분명하다. “공평하게 남은 쪽 얼굴에도 발자국 도장을 찍어줬으면 해서 말이야.” 윤호는 기영의 어깨를 밀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지소의 코끝까지 다가와서는 생글거리며 약을 올렸다. “오늘은 시간 남아?” “……” “저번에 시간 남으면 해 준다며. 그 약속을 철떡같이 믿고 왔는데 말이야.”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망나니 도련님의 얼굴을 노려볼 뿐이다. 기영이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다가섰다. “도련님.” “이게 누구야~ 불쌍한 우리 비서님이네?” “…전 안 불쌍합니다.” “내가 중학교 때 매일 도시락 싸들고 우리 학교에 왔었잖아, 그 정도로 충성했으면 할아버지도 야속하지. 왜 서인후 같은 인간에게 당신을 붙여줬을까.” 빈정거림이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그게 저 자식의 말버릇 인 것 같았다. 지소는 또 다른 포크가 없다는 게 사실 좀 아쉬웠다. 그리고 기영이 살짝 딱딱한 표정으로 계속 들여다보는 시계도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가연이라는 여자를 들키면 안 되는 모양인데… 서인후에게 연락을 하러 나가기에는 이 개망나니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가서 당신 볼 일 봐.” 지소는 침착하게 말했다. 조용한 그 어조에 기영이 번쩍 시선을 박는다. 사실은 떨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겁을 먹은 건 아니지만, 서윤호도 제 형 못지않은 미친놈이라고 볼 때, 이건 별로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힘으로 한다면 아마 아직 근력이 뒤지는 자신이 질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삐뚤어진 녀석들의 근본은 죄다 같았다. 욕을 하고, 모욕을 주면서 어떻게든 범해보려는 것이다. 반항할수록 더욱 심해진다. 그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 게다가 삐딱한 서윤호의 검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기영과 자신의 당황을 즐기는 표정이었다. “지소야…” 문득 기영의 목소리가 정말 염려를 담은 것 같았다. 그러나 지소는 몹시 긴장되는 기분을 끝내 감추며 귀찮다는 듯 기영에게 쏘아붙였다. “가라니까.” “……” “어차피 당신도 똑같은 인간이잖아.” 기영의 얼굴이 조금 더 흐려진다. 그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며 뭐라고 들리지 않게 욕을 내뱉었다. 서윤호가 그 모습을 보며 더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금방 돌아오지. 이사님께 연락만 드리고.” 검은 터틀 스웨터를 입은 서윤호가 반짝 반짝 눈웃음을 치고 있었다. 정말 건방질 정도로 ‘해볼 테면 해.’라는 표정이었다. 기영이 입술을 꽉 깨물고 화난 사람처럼 방을 걸어나간다. 지소는 서윤호의 몸에 가로막혀 그가 나가는 뒷모습만 조금 엿보았을 뿐이다. 자, 이제 어쩐다…. 어떻게 이 변태 놈 형제를 또 처리하지…. “원래 우리 형제들은 공동 재산에 약하지.” 그 때였다. 달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지소는 순간적으로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들었다. 재빨리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서윤호는 주도면밀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잠근 채 다가왔다. 도망갈수록 더 밑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소는 표정없는 차가움으로 위장해야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살짝 떨리는 동공이 잠긴 문을 향해 연신 돌아간다. 그것을 관찰하듯 서윤호는 굉장히 희색이 만면한 채 느긋하게 말했다. “공동 같은 건 없어, 고양이” “……” 얼굴을 맞붙이며 녀석이 덧붙인다. “누구든지 강한 놈이 가지면 그만이지.” 갑자기,쓱-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지소는 심장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는 무심결에 등 뒤에 위치한 책상의 모서리를 꽉 쥐었다. 서윤호, 스물 여덟. 모델처럼 잘생긴 그 얼굴에 잔인할 정도로 차가운 집착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비록 열 살이나 어린 자신이지만 소름끼칠 정도로 피부에 와 닿는다. 흠칫, 그가 내민 손가락의 끝이 얼굴에 닿았다. 지소는 자신이 그에게 입힌 세 줄짜리 얼굴 상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음미하듯, 녀석이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겨우 다잡은 형의 광기를 또 들쑤신다는 그 후장 맛 좀 볼까?” “……!!!” “남자 좆이 빠질 정도로 야무지게 죄어준다는데… 한 사람만 갖기엔 너무 아깝잖아, 어차피 셀 수도 없이 많은 놈들의 화장실이었으면서.” “……” 나무 책상을 꽉 쥔 손이 더 심하게 떨려온다. 지소는 표정도 없이 그 말을 듣고 있었지만, 그가 자신의 귀에 혀를 말아 넣으며 속삭였다. “배설용 인형.” “……!!!” “니들 같은 종자들은 심하게 말할수록 발정이 난다던데, 한번 울릴 기회를 주지 않겠어?” 쿵쿵쿵- 밖에서 문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선우기영이 뭐라고 크게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영이 두드리는 문소리가 너무 커서 지소는 귀가 마구 울리는 기분이었다. 문 쪽을 힐끔 바라보는 사이 서윤호가 입을 맞출 듯 얼굴을 비틀었다. “널 구해주러 올 사람은 아무도 없어.” “……” 그 말이 왜 그렇게 웃겼을까. 전혀 웃을 상황도 아니었는데, 지소는 이상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피식, 거칠게 새어나오는 웃음소리에 입을 맞추려던 녀석이 살짝 뒤로 물러선다. “이 상황이 웃겨?” 서윤호는 조금 약이 오른 표정이었다. 지소는 살짝 떨어지는 녀석의 체온에 한숨쉬며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아니. 내가 웃겨.” “……” 그러자 윤호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그것을 보며 지소는 약간의 시간이라도 번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조금은 떨리는 입매를 다 잡으며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지면 안 된다. 그는 아직 내 손님이 아니니까. “부잣집 망나니 도련님들 사이에서 흥정을 벌이지 못하는 내가 웃겨.” 그 싸늘한 눈매에 서윤호의 인상이 달라졌다. 그는 조금 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턱을 문질렀다. 지소는 뜸을 들이지 않고 재빠르게 덧붙였다. 순간이다, 순간. 싸움을 하고 싶다면, 싸움꾼이 가져야 할 자세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는 예리함이다. “얼마를 줄 건데?” “……!!!” “얼마를 줄 거냐고, 씹새야. 네 형처럼 놀고 싶은가보지? 그럼 대가를 가지고 와. 세상에 공짜는 없어.” 서윤호가 그 말에 고급 수트 위로 팔짱을 꼈다. 매우 재미있다는 눈빛이었다. “형에게 해 주는 것?” “그래, 네 악질 변태 같은 형이 해 주는 거 고대로 해 줄테니까, 가서 돈을 가지고 와.” “……” “여기서 옷 벗고 기다리고 있지. 다리 사이에 돈을 차곡 차곡 올려놓지 않으면 네가 아무리 좆을 박아대도 내가 끊어놓을 테니.” “…음” “그 정도 구멍은 돼. 그렇다고 내 입에 박으면 육회라고 생각하고 씹어버릴 줄 알어, 이 개새꺄.” 끝까지 냉정하게 말하는 것에 성공했다. 서윤호의 얼굴에서 잔인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대신 묘한 오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형은 얼마를 줬는데?” 그러나 서씨 가문의 윤호라는 녀석 역시 여간내기는 아닌 듯 보인다. 그는 자신의 말에 표정을 차갑게 흐리더니 담배를 빼물었다. 찰칵, 나른하게 켜지는 담배 끝을 입에 문 채로 그는 중얼거렸다. 자신의 태도에 사실은 당황했음에도 숨기려는 태도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저속한 욕망 속을 들여다본 자신이 모를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만. “내가 왜 너같은 걸 안는데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 고급 호스트도 아니고, 기껏해야 변소같은 남창 녀석을 안는데…”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생생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보다 나쁜 피답게 굴라고 했지? 그게 명령이야.’ 바로 귓전에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훅, 끼쳐오는 속삭임이다. 인간의 체온 36.5도. 그 보다 나쁜 피, 끓는 피…. 왜 일까. 그 찰나에 지소는 서인후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한 기분이었다. 수 년동안 자신은 뭔가를 포기당하거나 체념 당하며 살아왔다. 사람을 믿었고, 남들처럼 생활하고 싶다는 단순한 어린아이의 마음은 아주 오랜 기간 묵살당했다. 도망칠 때마다 붙잡히고, 뼈가 부서질 정도로 얻어터진 채 지하 골방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또한 회귀할 수 없는 시간의 일부분…. 결코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며 살아온 미련함이었을 뿐…. 그러니 그 개망나니같은 주인의 말이 맞았다. 시간의 망령은 누군가 끝내야 하는 것이다. 얽히고설킨 고리를 풀어버리는 것은 한 뼘 높은 인간의 체온, 37.7도…. 부글 부글 부글, 갑자기 그렇게 피가 끓는다. 덤벼… 라고 소리나지 않게 비명을 지르며 지소는 그에게서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용감하게 노려보았다. “잘 봐, 씹새꺄.” 그대로 지소는 차가운 얼굴로 셔츠를 확 잡아당긴다. 그는 태어나서 사내들 앞에서 옷을 스스로 벗은 일이 거의 없었다. 있다면 이 작자의 형이라는 서인후 앞이 거의 최초였다. 대부분은 옷을 입을 필요도 없었고, 또 대부분은 온갖 변태들에게 찢겨나갔다. 더군다나 그는 온 신경을 타고 흐르는 듯한 이 기묘한 독기로 옷을 벗은 적은 더욱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명 그랬다. “네가 왜 돈을 지불해야 하는지 내가 알려주지.” 그는 스스로 셔츠를 열어 상반신을 벗어보였다. 열려진 창문으로 강한 역광이 허리와 등에 붉은 색을 더한다. 휙 하고 벗겨진 하얀 셔츠가 펄럭이며 침대로 떨어졌다. 문득 서윤호의 입가에서 툭, 하고 담배가 떨어져 내렸다. “이 담배빵을 내는데 어떤 놈은 10만원을 더 냈다.” 지소는 아무렇지도 않게 쇄골 근처에 있는 화상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는 곧 여전히 무표정하게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가슴 부근에 어지럽게 나 있는 다른 자국들을 누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여기는 20만원을 더 냈지. 특별히 뼈에서 멀어지면 살이 약하거든.” “……!!!” “네가 보지 못하는 등 뒤에는 더 많은 상처가 있어. 내 등에 한 열 개 쯤 불로 지진 놈에게 물어봤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 “…대답은 간단했어. 해댈 때마다 몇 년을 해도 꿈쩍도 않는 시체같은 남창 새끼를 불붙게 만들려는 욕심 때문이지. 너도 같은 부류야, 안 그래?” 입안이 바싹 말랐다. 지소는 문득 기영의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공간도 아득하게 멀어진 기분이었다. 왠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주 먼 기억이 그 공간 틈을 대신 채워갔다. 흡사 두꺼운 털옷을 걸치고 있다가 그 누더기가 몸 위에서 하나 하나 벗겨져 나가는 것처럼, 탄탄하고 차가운 피부의 벽을 뚫고 피가 솟아나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임계점(臨界點)…. 며칠 전 공부하다 떠오른 단어, 그 임계점. 물질의 상태가 하나에서 또 다른 하나로 변하는 온도와 압력의 조건. 단단하고 견고한 벽에 감춰져 있던 하나의 뭔가가 몸 밖으로 맨살을 찢듯 고통스럽게 튀어나오는 하나의 순간. 지소는 마침내 자신이 뭐라고 말하는지도 잘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는 그저 입을 열었고, 그리고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쏘아붙였다. “고생도 모르면서 편한 소리 찍찍하는 나약한 도련님, 잘 들어.” 윤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이글거렸다. 그러자 지소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는 묘한 속도에 빠져들고 있었다. 휘휭, 바람을 가르며 달리듯 두근거리는 심장이 펌프질을 해대며 체온을 계속 달구어갔다. “얻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가격을 치러야지.” “……” 그리고 왠지… 지소는 입가에서 가늘게 말려 올라가는 스스로의 웃음을 감지했다. 희미하고 옅게, 그러나 분명 서윤호의 눈에 또렷이 보일 정도는 될 만큼 정확하게. 그는 주체할 수 없이 머리 속을 쿵쿵 거리는 맥박소리에 집중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일개의 남창 녀석을 담배로 지진 새끼들의 소원처럼 나를 불붙게 만들고 싶지? “……” “그럼 네 형보다 잘난 조건을 제시해, 이 개자식아. 이 정도는 어림도 없어.” 37.5 도. 그래, 1도만 높이자. 끓는 피가 증발해버리게…. ***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별로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지소는 관자놀이가 당길 정도로 아파왔다.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때문에 눈동자가 뻑뻑해진다. 손님과 흥정을 벌이다… 그런 일은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서윤호가 뭐라고 말할지 기다리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틈에도 재빨리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 가까이에 서 있는 서윤호와 문고리의 달칵거림을 바라보는 순간이 그렇게 피가 마를 정도로 초조한지 처음 알았다. “서윤호 인생 28년에…” 그리고 드디어 서윤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누구에게 보내는지 모를 조소를 지으며 조금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에게 키스하고 싶을 때는 지금이 처음이군.” “……!!!” 순간 지소는 자신이 머리가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뭔가 묘하게 어지러울 정도였다. 긴장감 흐르던 적막 뒤에 나온 너무 허탈한 말이어서 더욱 그렇다. 얼굴을 점점 찡그리며 쳐다보자, 서윤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싸움꾼 고양이야 그렇지?” “……???” “이 동네 저 동네 사뿐 사뿐 돌아다니면서 귀찮은 녀석들을 엿 먹이고 싶은 고양이… 형이 너를 그렇게 기르고 있군.” “……”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서윤호는 무심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내가 들은 말 중에 가장 좆같은 제안이야.” “……” “너를 사란 말이지? 형에게 값을 지불하고…” “귀가 있긴 있네.” 다가오는 속도에 잠시 흠칫 거렸지만, 지소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남자는 처음보다 한결 수그러진 태도였다. “그렇지만 이 잘생긴 얼굴에 난 상처는 치료해줘야겠어.” “……” “키스 한번에 없었던 일로 하지, 어때?” 지소는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콧잔등에 작게 주름이 생길 정도로 남자를 한심하게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진짜 이 집안 새끼들은 다 왜 이 모양인가. “나 모델이야.” “……!!!” 그러나 남자는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팬들에게 형의 고양이는 발톱에 세 개래요…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에게서 번뜩이는 이상한 날카로움은 조금 사라졌다. 단지 머리가 살짝 휜 것 같은 이 집안 특유의 광기는 여전히 눈동자 아래에 잠겨 있었지만…. 어찌할까…. 지소는 잠시 숨을 훅하고 들이쉬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마를 붙인 채 뭐라고 작게 키득거렸다.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형이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저번에도 봤지만, 우리 집 식구들 중에 제 정신이 얼마 없어서 말이야… 형의 여자를 집단으로 윤간하려고 한 적이 있었어.” “……!!!” “형이 말 안 하던가? 하긴… 말 할 인간도 아니지만…” “……” 어딘가 그 여자와 동요되는 기분에 몸이 부들 부들 떨렸다. 이마를 붙인 채 나른하게 속삭이는 그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서윤호는 씨익 웃었다. “형은 잘못 알고 있었어.” “……!!!” “윤간이 아니었어. 그 여자가 우리와 협상을 벌인 결과지. 일부러 옷을 찢고, 계란 흰자로 적당히 온 몸을 적시고… 그리고 나서 형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서 테이블에 눕힌 채 미친 것처럼 만들어놨지.” “……!!!” 이런 사람들 처음 본다… 정말 처음 본다…. 이상한 사람들이다… “형은 우릴 죽이려고 했어. 여자가 꾸민 짓이라는 걸 죽어도 몰랐을 거야. 그때는 알 기회도 없었지. 내 머리 통을 작살내고, 둘째 형의 코뼈를 부러뜨리고, 셋째 형이 의식 불명이 된 뒤에 집에 불을 질렀어. 형은 칼을 정말 잘 쓰기 때문에 정후 형은 목에 상처가 생겼어. 모두가 죽기 일보직전에 기영이가 구했어.” “……!!!” “그리고 그 뒤로 그 인간은 정신병원에 갇힌 거야. 그게 우리들이 원하던 결과였거든.” 왜…, 라고 작은 신음처럼 질문이 튀어나왔다. 본능적으로 나온 질문에 서윤후는 빙긋이 웃었다. “형은 우리 집안의 완벽한 이단자야. 서인후는 자기 어머니를 죽인 그 남자를 절대 용서 안 해. 할 수 있는 한 모든지 파괴시켜 놓지. 그 때는 어렸기 때문에 그걸 직접적으로 드러냈지만, 나중에는 숨긴 채 목표에 다가가는 법을 알게 된 거야.” “……” “우리는 양보라는 거 없다, 윤지소. 너는 천국에 들어왔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는 아무도 서로를 봐 주지 않아. 내가 자란 이십 팔년 동안,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빼고 이 집안은 미친 귀신들의 집안이야. 우리 가족들은 아무도 믿지 마, 아무도. 결국은 모두 먹을 게 있어서 먹인 하이에나들에 지나지 않아. 목적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아. 필요에 따라서 동맹을 맺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파트너를 제거해야지. 그게 여기의 규칙이야.” 그리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지소는 어안이 벙벙한 느낌에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말았다. 그러나 방심하지 마라, 라는 서윤호의 충고는 결코 헛된 게 아니었다. “…읍…!!!” 갑자기 입천장을 뚫을 듯 거친 혀가 밀려들어왔다. 욱, 하고 뭔가 삼키는 기분이 들 정도로 그것은 거세고 막무가내였다. 팔을 휘 저으며 지소는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녀석은 자신의 허리를 바싹 잡아당긴다. 아차, 하는 사이에 빠르게 아랫도리가 비비어졌다. 뜨거운 열이 허벅지에 바싹 전해진다. 몸을 비틀며 빠져나가려 할수록 혀는 더 강하게 파고들었다. 마치 입안을 찢듯이 휘젓는 기분에 잠시 머리가 멍해진다. “…잠…” 성질이 와락 솟구치고 만다. 지소는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잡았다. 힘에서는 다소 밀리지만, 얼마든지 몸 싸움을 벌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이제 끓는 피이므로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뚝-. 문득 머리 속을 쾅- 하고 울려대는 것은 자신의 몸부림이나 서윤호의 힘이 아니었다. 대신 다른 것이 귀청을 떨어져 나갈 듯 방 안에 크게 울려퍼졌다. 콰앙- 하고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 열린 것이다. 머리가 정말 멍한 기분이다. 지소는 자신의 입안을 유린하던 뜨거운 기운이 그 소리에 살짝 빠져나가는 걸 깨달았다. “떨어져.”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자 그 때서야 상황이 모두 보인다. 또한 그 상황은 아쉽게도 제 정신이 들기 전에 정말 쏜살같이 종료되어 있었다.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서인후가 아니지.” 서윤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갔다. 지소는 문짝을 으깨어버리 듯 발로 차고 들어온 남자와 그 등 뒤의 다른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서인후가 아니지.’- 라는 말에 걸맞았다. 고급스러운 목재 문을 형편없이 만들어버린 이 집의 주인이 냉랭한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윤호는 방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날 때리면 형은 지는 거야.” “……” “어차피 이 집에 저런 녀석을 끌어들인 형의 책임이니까.” 그 때까지도 서인후는 별 말이 없었다. 표정도 늘 보던 대로 차갑고 딱딱할 뿐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지소는 그나마 상황이 최악으로 나가지 않는 것에 안심하며 조심 조심 셔츠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마 서윤호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는 한껏 빈정거리듯 입술을 비틀고 있었다. “저 녀석이 그러더군. 형보다 많은 액수를 제시하면 나에게 올 수 있다고. 떠나고 싶어하는 눈치잖아?” “……” “원래 그런 놈이라는 거 알고 산 거지? 왜 분위기 살벌하게 만들고 그래? 저런 녀석들은 누가 박든 돈만 많이 주면 그만이라구. 나한테 팔아, 어때? 저 녀석도 내가 돈만 더 많이 주면 신경 안 쓰는 눈치인데. 내가 더 굉장한 놈으로 하나 건져다 주지.” 가령… 서윤호가 마지막 말을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한 건지, 혹은 의도적으로 한 건지는 분명치 않다 해도… 분명히 모델이 직업이라는 그의 잘난 척으로 보건데 그런 말은 하지 않는 게 나을 뻔 했다. “……!!!” 지소는 갑자기 살짝 얼어붙는 예감이었다. 뭔가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 스르륵, 피부를 기어다니듯, 척추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팔에 소름이 돋는 듯한 시선이 자신의 등 뒤에 박히고 있었다. 그것이 서인후의 눈동자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지소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탐탁치 않는 상황이 시작될 것 같았다. 그러나, 퍽!!! 서인후 쪽이 훨씬 빨랐다. 그는 표정 하나 변화 없이 바로 칼날같은 주먹을 동생에게 내리꽂았다. 기영이 고개를 저으며 그들 사이에 한 발자국 내딛는 게 보였다. 그러나 역시 퍼억!!! 연이어 빠르게 주먹이 그 잘생긴 얼굴을 향해 마구 뻗어나갔다. “그만 하세요!” 기영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휘청이던 윤호는 무릎이 잠시 꺾이더니 두어 대 쏟아지는 주먹에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허나 그런다고 봐 줄 서인후가 아니라는 걸 지소는 한참 후에나 알았다. 그는 그대로 긴 다리를 뻗어 서윤호의 허리가 부서질 정도로 내리쳤다. 뭔가 기묘하게 사람의 몸이 꺾이는 순간, 뼈가 부딪치는 탄성의 효과라는 걸 지소는 곧 직감했다. “악!!!” 짧은 비명이 튀어나오며 남자는 침대 쪽으로 머리를 두고 쓰러진다. 서인후가 구둣발이라는 것을 지소는 그 때 처음 깨달았다. 뭔가 부욱, 하고 서윤호의 이마 쪽에서 찢겨 나갔다. 한 눈에 보아도 전문가적인 팔놀림은 지소가 지난 날 가게에서 보았던 덩치 만 큰 깍두기 녀석들과도 영판 달랐다. 서인후는 상당히 날렵하게 주먹을 계속 뻗었고, 패자가 쓰러질 때도 그 잘난 면상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파박, 핏자국이 가늘게 튀었다. 그대로 질식할 것처럼 신발 아래에서 숨을 어푸 거리는 서윤호를 향해, 이 미친 주인은 가장 가까이 있는 화분을 가볍게 들어올린다. “그만 해!!!” 지소는 무심결에 고함이 튀어나왔다. 처음 퍼억, 하고 소리가 날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 소리는 자신이 맞던 상황과도 비슷했고, 견디기 힘들 정도로 오금이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폭력의 무분별함… 나약하지 않은 자아를 가두게 만드는 감옥. 그것의 느낌이 뭔지를 잘 안다. 처음 한 두 번은 반항이라도 하기 위해 주먹을 뻗지만, 급기야 그 피투성이 잔치에 종속당한다. 지소는 서윤호가 자신을 향해 모욕을 퍼부으며 눈을 번뜩였을 때 보다 더 패닉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오히려 자신이 열 여덟살의 그래도 건강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성적인 것은 힘의 논리일 뿐이었다. 그것도 일종의 폭력이었다. 그러나 눈 앞에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듯 사람이 짓이기는 것은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정말 싫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화분을 높이 쳐 든 서인후의 팔을 붙잡았다. “그만해.” 숨이 헐떡인다. 뭔가 심장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공포로 눈을 둥그렇게 뜬 지소였다. 서인후가 자신의 만류에 잠시 내려다보았다. “그만해. 이러다 죽이겠어.” 정말 잘 싸우는 사람들은 반드시 조심해야 할 게 있다. 그들은 명치를 제대로 알고 있고,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목을 비틀어서라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 지소는 오랜 시간 싸우는 놈들을 여럿 보아왔지만, 이 정도로 숙련 된 솜씨는 처음 보았다. 그는 정말 힘도 별로 들이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우아하게 팔을 뻗고 몇 번 허리와 다리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그리고는 쓰러진 사냥감의 숨통을 한번에 끊어놓을 듯 밟아댔던 것이다. 기영이 재빨리 다가와 자신의 상관을 말리듯 감싸 안았다. “이사님, 제발…” “……” “도련님은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겁니다.” 그러자 서인후가 표정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가만히 쳐다본다. 그 때서야 지소는 이내 그가 자신의 벗은 상반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찌 되었더라… 라고 생각하는 순간, 서인후가 험한 발길질로 여기 들어오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윗통을 벗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라…. 분명히 동생이 한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돈만 더 많이 주면 누구에게라도 갈 수 있다’- 라고. 지소는 자신이 잡고 있는 하얀 셔츠의 팔에서 높은 온도가 전해짐을 깨달았다. 게다가 아직도 주인이 밟고 서 있는 동생의 얼굴은 인간의 신음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으으으- 라고. 재빨리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이 남자는 미친놈이 맞고, 그가 서윤호의 말대로 정상인 척 행동하는 것일 뿐이다. 함부로 그의 광기를 자극하면, 날카로운 유리에 목이 베인다든지, 화분으로 머리가 부서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정말 그렇게 이야기 했어.” 지소는 그의 팔에서 재빨리 손을 떼며 빠르게 말했다. “내가 당신 동생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 남자의 눈이 가늘어진다.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또 한번 몸이 오싹해졌다. 이 남자…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의 구두로 짓눌린 저 엿같은 놈을 빨리 병원에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나한테 말했잖아! 언제든지 원하면 아무 놈하고나 자도 된다고.” 지소는 바싹 마른 입 안으로 침을 삼키며 빠르게 말했다. 그러자 서인후가 웃는듯한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게 본다면 웃는 게 아니라 비틀어지는 입매였다. 그는 잠시 뭔가 더 생각하듯 화분을 들고 있다고 그대로 아래로 내던졌다. “……!!!” 쿵-. 그러나, 다행히도… 화분은 서인후가 발을 땐 서윤호의 얼굴에 가서 부딪치진 않았다. 서인후는 살짝 각도를 바꿔서 서윤호의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큰 화분을 던진 것이다. 휴우, 하고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기영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미친 주인 놈은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엎드린 채 우우우- 거리는 서윤호가 더 형편없이 피투성이였기 때문에 지소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자세히 보니 그는 부러진 이빨을 찾고 있었다. “잘못 생각하고 있군, 윤지소.” 사내는 일방적인 휘두름을 행사하고는 저 혼자만 깔끔하게 문가로 다가갔다. 그의 말에 고개를 휙 돌리자 그는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차갑게 말했다. “네가 원하면 누구와 자든 나는 신경 안 써. 하지만 넌 물건이고, 너를 산 주인은 하나다. 그걸 잊지 말라고 경고했지.” “……!!!” 그리고 남자는 씨익 웃었다. “떠나고 싶다면 기념식을 상당하게 치러주지. 어차피 쓸데도 없고 모양으로만 달린 네 성기를 잘라서 개들에게 던져줘도 좋겠군. 그걸로도 모자라면 네 예쁜 거기를 두 번 다시 못 쓰게 찢어놓을 수도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빈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으로 절대 그냥 하는 말은 없다고 못 박았었다. 꿀꺽, 그 섬뜩한 표정에 지소는 잠시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체온, 39.5도. 자신보다 1도는 더 높다. 따라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 “이 미친 인간아.” 지소는 그의 귓전에 대고 속삭였다. 서윤호가 꿈틀거렸다. 앰블란스에 실려가면서도 서윤호는 뭐가 웃긴지 키득거린다. 이 놈도 단단히 미쳐있었다. “얼굴이 밀가루처럼 피떡 반죽이 됐는데 웃음이 나옵니까?” 기영 역시 한심하다는 듯 서윤호의 늘어진 팔다리를 보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서윤호는 웃기도 힘들만큼 찢어진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계속 웃어댔다. “뇌를 다쳤군.” 지소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의 웃음이 정말 미친놈처럼 목 안에서 잠겨들었다. “난 안 미쳤어, 남창 새끼. 미친 건 그 새끼지.” 윤호는 중얼거렸다. 한숨을 쉬며 기영과 눈을 맞추자 기영 역시 기가 찬 표정이었다. “도련님, 아버님께는 뭐라고 말합니까?” “흐흥, 그 인간에게 뭔 말을 하게?”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서윤호는 팔을 저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앉아 있는 지소를 바싹 끌어당겼다. “……???” 정말 뇌라도 다친 건가. 그런 놈 많이 봤는데…. 잘못 맞아서 뇌진탕 되고 칼에 사시미를 뜬 것처럼 자국이 난 녀석도 봤는데… “퇴원하면 널 사러 갈게.” “……!!!” 그러나 서윤호은 비교적 깨끗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정말 잔뜩 찢긴 그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도대체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게 왜 이렇게 힘든 거야.”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인상을 흐리는 지소를 향해 서윤호는 앰블란스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탁 뱉으며 중얼거렸다. 으으으…라고 갈비뼈도 감싸 안으며…. “너 어차피 그 미친 놈하고 있어봤자 좋을 거 없어. 넌 기껏 해 봤자 안가연의 대타 밖에 안 돼. 우리 형은… 한번 돌면 눈에 뵈는 게 없거든. 수년간 안가연에게 미쳐 있었으니, 너 같은 건 백날 거기서 뒷구멍 열어줘도 별 대접 못 받아.” 너라고 어지간하겠냐- 라는 말이 목구멍 앞에까지 튀어나왔지만 꾹 참는다. 찢긴 것도 입이라고 저렇게 열심히 말하는데 들어줄 매너 정도는 있었다. “제대로 안긴 적도 없지?” “……!!!” 그러자 서윤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거 봐,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너무 아쉽잖아, 미소년. 우리끼리 잘 해 보자구.” “……” “다른 건 몰라도 제대로 안아 줄 수는 있어.” 그런 놈이 자신한테 이상한 소리나 덜컥 덜컥 했단 말이지…. 지소는 귀찮은 표정으로 목덜미를 잡은 그의 팔을 풀었다. 기영이 한숨을 쉬며 앰블란스 앞에 앉은 구급 요원에게 말을 걸었다. “입마개 없습니까?” “……!!!” “가급적이면 튼튼한 걸로요. 안 되면 청 테이프라도…” 서윤호는 정말 미친놈처럼 그 말에 꺼이 꺼이 웃고 있었다. 그 자신이 표현했듯이 이 집안은 미친 귀신들의 집안- 그 말이 딱 맞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소는 피투성이가 되고 퉁퉁 부은 인간이 이렇게 웃는 게 진짜 괴상하다고 여겨졌다. “여전히 파란만장한 하루군.” 서윤호를 무사히 입원시키고 나오며 기영이 중얼거렸다. 그 때서야 지소는 작게 한숨이 밀려나왔다. 휴우, 하고 짧은 숨을 몰아쉬자 그가 툭 하고 어깨를 한번 때렸다. “뭐, 시원한 거라도 마시고 갈까? 진을 너무 많이 빼서 말이지.” 그가 뽑아주는 차가운 냉커피를 받아들며 지소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았다. 사실, 병원에도 자주 온 적이 없었지만, 병원 VIP 실은 또 처음 가 봤다. 가보니 물론 별천지 같았다. 아픔에도 돈의 무게가 있다니, 지소는 은근히 부아가 받치기 시작했다. “부자라고 해서 좋은 건 아니라는 걸 알았어.” 기영이 자신의 말에 피로한 듯 넥타이 매듭을 풀다가 힐끔 돌아보았다. 지소는 씁쓸하게 웃으며 커피 캔을 꽉 쥐었다. 돈만 있으면 될 거라고 한 때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저렇게 형제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니... 돈이라는 건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것 같아.” 그 말에 기영이 동의한다는 듯 벤치에 앉으며 느긋하게 셔츠 앞 단추를 풀었다. “서윤호 도련님은, 질투하는 거다...” “.....?” “널 질투하는 거야. 이사님이 너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푸니까. 도련님은 삐딱하긴 하지만, 자기 형을 동경하지. 그 집안에서 유일하게 회장님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사람이거든. 돌아가신 전 회장님의 총애를 가장 받기도 했고...” “... 그 가연이라는 여자랑 도망간 놈도 있잖아. 그 사람도 자기 집안 사람들에 개의치 않는 거 아냐?” “그래... 하지만 정후 도련님은 뭘 해도 좀 초연한 스타일이고... 이사님은 싸워서 얻어낸 거다. 그건 중요한 차이점이지.” 글쎄... 도대체 뭐가 다르다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이사님이 안 해 본 게 거의 없다는 말은 들었지?” “......” “너처럼 몸도 팔아보고, 턱도 없이 유학을 간다고 말해놓고는 가연이 아가씨를 빼돌리고... 게다가 용병까지 갔지. 가연이 아가씨가 없었다면 거기서 인생을 끝냈을지도 모른다고 집안 분들은 믿지만... 나는 그게 아니라고 봐.” “......” “이사님이 아직 미성년자였을 때, 할아버지인 전 회장님이 돌아가셨고... 거액의 유산을 이사님 앞으로 남기셨다. 가장 수익률 높은 자사의 지분도 이사님 앞으로 돌려놨지. 모두가 눈을 번뜩이고 있는데 그런 결과가 나왔으니...열 일곱 살의 이사님이 취할 방법은 하나 밖에 없었던 거다.” 아마도 그 전 회장님이시라는 할아버지와 서인후는 꽤 친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자신은 0을 붙이기도 힘든 금액의 재산을 어린 녀석에게 넘겼겠지. 그러고 보니 그 집안 사람들의 정서로는 왠지 눈에 선하다. 아마 그 할아버지라는 사람이 죽었을 때도 비통함보다는 다 같이 모여 어떻게든 가면을 쓰고 유산의 행방을 좇는 게 전부가 아니었을까. “맞아.” 선우기영은 활짝 웃으며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 “서인후가 이사님이 되기 위해서는 방법이 딱 하나야.” “......”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인생 경험. 그런 게 필요한 거다. 누구도 그에게 딴지를 걸 수가 없게 만들어야했지. 그걸 위해서라면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니까. 마약이든, 환각파티든, 군인이든, 전문 후계자 수업이든... 난 서인후가 진짜 그걸 즐긴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어. 그 사람은 일부러 그런 행동들을 한 거야. 무서운 사람이지.” 즐기지 않는다면 왜 하는 거지. 나 같이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한 인생도 있는데... 그건 인생을 너무 갉아먹는 행위잖아... “휴우...” 자신의 질문에 선우기영은 미묘한 한숨을 쉬었다. “네가 모르기를 바랬기 때문에 경고했지만...” “......” “어차피 내가 아니라도 다른 도련님께 들을지도 모르지. 이사님이 유산과 지분을 지키려는 목적은 단 하나다.” “......” “어머니 때문이야. 이사님의 아버지이신 전 회장님은 일본에서 이름 높은 화류계 여성이었던 한 분을 거의 억지로 안았고...” “......” “돌아가신 이사님의 어머니...전 여사님은, 어린 아들에게 자신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그 앞에서 자결하셨다.” “......!!!” “할복하셨다. 어린 이사님이 받은 충격은 말로 못할 정도였겠지. 그게 이사님이 아무런 감정도 없이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르고,...가연이 아가씨에게 집착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고... 자신의 아버지를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이유일지도 모르고... 사실은 관심도 없는 회사를 지키려는 이유일지도 몰라. 지금 회장님은 나머지 지분마저 잃으면 거의 껍데기만 남는 것이거든.” 결국, 어디가나 그 서인후라는 인간은 목적과 복수심밖에는 살아있는 게 없군. ... ... ...난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어쩌면 이사님은 긴 시간 동안 인간미를 버리도록 자기를 단련해 왔기 때문에... 오늘 같은 일은 사실 비일 비재해. 윤후 도려님은 이사님을 자극하기 위해서 자꾸 사고를 치거든.” 기영이 담배를 빼물었다. 지소는 덤덤하게 그 말을 잘라버린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인후. 그러나 선우기영은 자신의 못마땅함을 짐작하지 못하는 듯 중얼거렸다. “윤후 도련님이 사실 제일 불쌍하지. 다른 형님들처럼 목적의식에 불타는 것도 아니고... 사실 6살 때 이 집에 들어와서 가장 가까운 형인 인후 도련님하고 친하고 싶어했는데... 이사님이 계속 내치셨다.” “......” “그래도 나이 차이가 가장 안 나는 형제니까... 두 분은. 윤후 도련님은 마음이 약한 편이라서... 가족들 중에 누구에게도 기대기 힘들고...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곤 인후 도련님 뿐인데, 이사님은 한결같이 거부하시고...” “......” “윤후 도련님이 삐뚤어진 건 인정하지만... 어릴 때부터 돌봐주는 가족도 없이 외롭게 자랐는데, 늘 인간미 없이 대하시는 이사님도 좀 문제가 있는 거지. 서윤후가 유일하게 동경했던 게 이사님인데, 이사님이라도 좀 부드러웠으면 말을 들었을지도 몰라. 윤후 도련님은...다른 도련님들하고 달라서, 돈에는 별로 관심이 없거든.” 그래... 그러고 보니 너무 한 것도 같다. 아까 얻어터지는 꼴을 보니, 거의 맥을 못 추던데... 그러면서도 얼굴이 실컷 찢어져서는 바보처럼 웃는 꼴이라니... “아직도 생각나. 윤후 도련님이 개나리 유치원 모자를 쓰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는데...처음 이 집안에 와서 뭐가 뭔지 몰라서 인후 도련님 물건을 건드린 적이 있거든. 그러다가 그 때도 죽싸게 얻어맞았지...” 지소는 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서인후가 몇 살이나 더 많다구... 한마디로 그 괴물은, 자기만 내키는대로 하는 게 옳은 거라 믿는다는 거군. 마음에 안 들어... 안 들어... *** 기영의 이야기를 듣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는 거의 밤 10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그 여자가 온 뒤로 조금은 밝아진 집안 분위기에 다시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뒤 따라 오던 기영이 어깨를 툭 치며 단조롭게 말한다. “이사님이 별 말씀 없으시니, 올라가서 자라.” 볼 일은 끝났다는 말이다. 넓은 1층 거실 저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마도 반쯤 열려진 서재의 문으로 보건데, 저 불빛은 이 집의 주인과 그의 옛 애인이 만든 불빛이 아닐까 한다. 지소는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가 자신의 온도를 0.5도씨 올려놓았다. 그럼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다. “그 아가씨라는 여자 소개 시켜 주기로 했잖아.”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휙 돌아보며 묻자, 기영이 일순 당황한 눈치였다. “뭐...?” “오늘 소개 시켜 준다며? 집 안에서 기르는 개는 주인의 애인도 만나지 못하는 건가?” 지소는 자신이 고집을 피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연이라는 여자와 자신이 만나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여자의 지금 애인을 훔쳐와야 하는 게 자신의 몫이니까. 더군다나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은 개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규칙 위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온 38.5도.... 당신이 미쳤다면 나도 같이 미쳐 준다. “잠깐만...” 자신이 척척척 싸가지 없게 서재로 향하자 놀란 기영이 따라붙었다. “왜 그래?” 오늘은 일도 많은데, 웬만하면 이 잘생긴 비서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소는 오늘 서인후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이 변해야 하는 방향을 깨달았다. 광기의 전염, 그 바이러스가 내 뇌를 뜨겁게 만들길 원한다. “......?” 휙, 하고 문을 힘차게 열자, 안 쪽에서 책을 보던 가연과 서인후가 고개를 돌렸다. 둘이 딱 붙어 있는 모습을 보자 지소는 입안이 바싹 말랐다. 마음에 안 든다, 서인후. 나에게 뭔가를 불러일으키고 전염시키고 싶다면, 그도 자신이 뭔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뭐지?” 싸늘한 태도로 그가 허리를 일으켰다. 지소는 기영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쾅, 하고 닫아버린다. 그리고는 단걸음에 그 얼굴을 향해 조용히 다가섰다. “......” 주인이 눈을 가늘게 뜬다. 지소는 그러나 그 표정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저 손아귀에 힘을 주고, 심호흡을 한번 해 준 채 손바닥 안에 촉촉이 배는 땀을 음미했다. 하나, 둘, 셋... 속으로 박자를 셌다. 서인후의 눈동자로 반짝, 인광이 비추었다. 그러나 지소는 그 싸늘한 눈매를 마주하며 힘차게 손을 뻗었다. 곧이어 찰싹-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따끔거리는 손바닥을 느끼는 순간, 지소는 드디어 초조하게 식은땀 나는 순간을 넘겼구나...라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때리다니... 그것도 나를 산 주인놈을... “왜 때렸는지 이유라도 들어볼까?” 그러나 맞은 놈은 오히려 침착하게 물었다. 그 잘생긴 얼굴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 살짝 붉어진 뺨 빼놓고는 조금 전에 울린 피부의 소리가 환청같이 느껴졌다. 가연이 놀라서 일어서는 소리 외에는 조용한 적막이 흘렀다. 지소는 살짝 입술을 훔쳤다. 때린 놈도 맞은 놈도 이렇게 조용한 관계는 처음이었다. “당신 동생이야.” 비로소 지소는 마른 입안을 축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심장은 부지런하게 뛰었지만, 그는 표 나지 않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여차하면 이 짐승같은 놈이 뺨 한번 때린 거 가지고 치사하게 개 패듯 팰지 모른다. 그러니 이를 악물고 할 말은 해야 겠다. “그래서?” 주인놈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었다. 가연이라는 여자가 난처한 듯 가운데서 안절부절해 한다. 지소는 그 모양을 힐끔 쳐다보며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에게 환경을 탓하지 말라고 말한 건 당신이야.” “...근데?” “그럼 당신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건, 당신 주변 사람들한테는 좀 더 시간을 줘.” “......” “가족이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사람도 있어. 당신처럼 나에게도 동생이 있다면 나는 안 그래. 나에게 세상에 지지 말라고 말했다면... 당신도 그렇게 살아.” 그러자 서인후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깊어졌다. 그는 생각하는 표정으로 턱을 감쌌다. 두근 두근, 지소는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개차반 주인의 주먹을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그러나 결코 그 두려움을 들키지 않게 눈 꼬리에 힘을 주고 씩 웃어보인다. 그래,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새로 만들어 볼 거다...- 라고. “날 돈 주고 산 놈이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는 건 나도 싫어.” “......” “당신이 아무리 휘두르려 해도 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지.” 눈동자 사이에서 불이 일었다. 반짝거리며 긴 침묵의 시선 사이로 부지런히 초침이 흐른다. 그러나 두 사람은 냉정한 얼굴로 서로 쏘아보았다. 서인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지소는 몸 안에서 부글거리는 뭔가를 느끼며 끝내 꽉 쥔 주먹을 풀지 않았다. 아주 한참 후에야 건방진 주인은 씩 웃었다. “매운 손이군.” 그리고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서인후의 웃는 모습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소는 살짝 난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막대어 먹은 주인놈은 자신을 때릴 생각이 없어보였다. 대신, 보고 있던 서류를 넘기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가라.” “......” “네 충고는 귀담아 듣도록 하지.” “......” 허나 지소는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서인후에게 겁도 없이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스스로 이외에는 아무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주인에 대한 반발감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물러서면, 주인은 앙탈진 애교 쯤으로 보고 넘길지도 모른다. “난 아직 볼 일 안 끝났어. 소개 시켜 주기로 했잖아.” 지소는 턱으로 여자를 가리켰다. 긴 머리를 땋은 여자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살짝 웃고 있었다. 그 쯤에야 서인후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자신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 쪽은 한가연, 그리고 이 쪽은 윤지소. 됐지?” 정말 상당한 인사법이다. 지소는 여자 쪽을 한번 쳐다보고 씩 웃었다. “그게 아니지, 이사님.” “......” “적어도 상대방이 뭐하는 사람이고 왜 여기 있는지는 알려주는 게 인사 아닌가?” 그러자 가연이라는 여자가 손으로 뭔가를 부지런히 그렸다. 이해할 수 없는 손짓에 지소는 눈을 가늘게 하고 서인후를 쳐다본다. 서인후는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에 슬쩍 웃었다. 자주 웃는다, 이 여자 앞에서는... 그것도 입매가 조금 풀린 나른한 미소를 자주 짓는다. 그것은 기영에게나 자신에게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웃음이어서, 지소는 살짝 약이 올랐다. 그래, 저 천하의 개망나니도 저 여자 앞에서는 저렇게 웃어보인다. “뭐라고 하는 거지?” 의심쩍은 눈빛으로 서인후에게 묻자, 그가 조금은 따뜻한 미소를 싹 거두며 자신을 향해 대답했다. “네가 내 애인이냐고 묻는군.” “......!!!” “지금까지 나를 때린 사람은 가연이 밖에 없었으니까.” 그래, 오죽했겠나. 지소는 냉소적으로 피식 웃었다. 그러나 서인후는 자신을 무신경하게 쳐다보더니 가연을 향해 마찬가지로 수화를 건넸다. 역시 무슨 말인지 몰라 은근히 눈살을 찌푸리는 자신에게 인후는 곧 손을 거두고 조용하게 말했다. “내가 너를 돌봐주고 있고, 가연이와 형을 위해 일 할 거라고 말했다.” “......!!!” “내일부터 가연이랑 잘 지내도록 해.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 “내일 정후 형의 집으로 가연이의 짐을 가지러 가라. 그게 네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다.” 결국은, 저 여자의 시종이라는 말인가? ...지소는 어쩔 수 없이 삐뚤어지는 미소로 그를 쳐다보았다. 서인후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책상 위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더 말할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늘 그렇듯 차갑고 냉정한 말투로 딱 잘라 말했다. “가연이를 잘 돌봐. 일정마다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 “형은 내일 만나게 될 거다. 형을 만나러 가기 전에 내가 미리 연락 하도록 하지.” “......” 지소는 그 말에 벌써 등을 돌렸다. 뭔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지만, 꾹 참고 말았다. 이 집에 온 뒤로 모든 사람들에게 들은 말이었다. 괴물 서인후에게도 딱 하나 소중한 사람이 바로 한가연이었다...라는 말. 자신은 그 한가연을 되찾기 위해 사용되는 물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대가로 키워지고 있는 것이고. 어쨌든 뺨이라도 한 대 속시원하게 때렸으니 다행이다. 지소는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 보았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자신이 의견을 표현한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되는가... 손바닥 안에 심장이 숨은 듯, 이 단순한 행동 하나에 기분이 싹 시원해지는 이유는 뭘까... “...조건이 있어.” 그래, 이제는 호락 호락 당하고 있지 않겠다. 가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얻어터지고 굴욕을 강요당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도 그냥 당하고 살지 않겠다. 서윤후와 서인후, 그리고 이제 앞으로 만나게 될 서정후까지... 어쩌면 자신이 가진 비밀이 가장 우세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유혹의 탈을 쓰게 됐지만, 그런 자들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상대방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것 아닌가. 그래... ...당신이 나를 이용하려 할 수록, 나도 당신을 이용해주지. ...누가 더 싸움에 능한지는 앞으로 두고 보자구. “내가 당신 형에게 가는 대신...” “......” “당신도 병원에 있는 동생에게 찾아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형에게나 동생에게나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하겠어.” 만만치 않은 상대 서인후가 그 말에 옅은 비웃음을 띠었다. “네가 앞으로 가질지 모르는 모든 기회와 지금 누리는 모든 것을 잃어도?” 그 말이 어쩌면 사실이다. 자신은 사슬이 아주 아주 긴 족쇄를 발목에 차고 있는 꼴이다. 아주 아주 긴... 그러나 지소는 살짝 고개 저었다. “모든 것을 잃어도.” “......” “원래 모든 조건을 다 거는 게 진짜 싸움꾼이야. 나도 당신 못지않게 밑바닥에서 배웠거든.” 어떤 잡초처럼. 아무리 얻어터져도 자신을 걸 수 있는 사람처럼. 아무런 열광이 없다 해도 계속 덤빌 수 있는 싸움꾼처럼. ...그게 진짜 광기의 바이러스다. 당신이 그걸 내게 전염시켰으니, 이제 나를 산 사람으로서 적당한 자격을 가져야 하고.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노려보자, 서인후가 서늘한 얼굴로 여느 때보다 훨씬 조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 “하극상은 이번만 봐 주는 거다, 윤지소. 네가 형에게 어떤 사실을 말해도 나는 끄덕없다.” 왜 일까... 지소는 그 순간, 마치 서인후가 이런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맥없이 인형처럼 늘어져 있는 자기 연민 보다는 오히려 얄미울 정도의 건방짐... 왠지 그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변화 시키려 한 게 정말 이런 건가...라는 의구심이 드는 순간, 서인후는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가리켰다. 순간, 갖가지 의심이 솟구쳤지만, 지소는 가연을 한번 노려보고 문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문 밖에는 화가 난 기영이 투덜거리는 얼굴로 버티고 있었다. *** “이사님.” 기영은 서둘러 자신의 상관을 불렀다. 문 밖에서 듣기에는 내일 윤지소를 서정후 전 이사님께 보낸다고 하셨다. 너무 시기상조가 아닐까...라는 염려가 먼저 들었다. 지소의 말마따나 열 여덟의 윤지소가 서정후에게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으면 결코 서인후의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느긋한 부름에도 상관없이 상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가연에게 대답했다. 한가연이 방금 수화로 말했다. ‘어리지만 기품이 있어.’ 믿을 수 없다... 그 말에 서인후는 비웃지도 않고 광인처럼 눈을 얼려버리지도 않고 매우 매우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기영은 어딘가 끼어들 수 없는 그들만의 대화에 잠시 허가 찔렸다. ‘윤지소라는 녀석...’ 가연이 침묵하는 고통을 달래려는 듯 조용하게 웃었다. 지소의 이름이 나오자 서인후의 짙은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윤지소라는 아이...열 여덟 때의 너를 보는 것 같아.’ 기영은 서인후가 열 여덟일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뚜렷하게 준수하고 깨끗한 외모였으나 거칠고 우울한 눈동자를 가진 녀석... 그리고 이 비밀스러운 대재벌 집안의 오물투성이는 죄다 자신이 끌어들이던 녀석... 마치 대 놓고 보여주듯 일부러 그런 행동들을 하며 모든 사람을 당황시키던 그 녀석... 서인후가 그녀의 말에 조용하게 고개 끄덕였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을만큼 잔잔하게 웃으며 고요하게 말했다. “그래...” 기영의 입이 쩍 벌어지게 만든 말은 다음에 튀어나왔다. “내가 강할수록 저 녀석도 강하게 대응하지. 화가 났을 때 가장 멋진 녀석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을 싹을 가지고 있어. 본인은 어리기 때문에 모르겠지만... 때가 되면 나를 이기겠지. 내가 기대하는 게 그런 것이고.” 서인후가 자신을 이길 사람을 찾고 있다고? 내가 지금 귀가 잘못 된 것인가... 아니면...뇌가...? 서인후만한 괴물이 또 나온다고...? 그러나 애석하게도 잘못 들은 게 아니다. 서인후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마치 오늘 윤지소가 지극히 이성적으로 자신의 뺨을 때릴 것을 예측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기영은 결국 그 자리에서 끼어들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며 서재에서 물러났다. 어쨌든 어떤 돌발 상황조차도 서인후는 즐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집에서 키우는 예쁜 고양이에게 뺨을 맞았다 하더라도 말이다.